우리 형제들은 요즘 벌초를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6.25 참전용사라서 이천의 국립호국원에 어머니와 함께 잠들어 계시고, 국유지에 유택을 썼던 조부모님들은 이장을 해 화성시 추모공원에 모셨다.

그 전에는 1년에 두 세 번 정도 형제들이 모여 벌초를 했다. 모기와 벌, 간혹 뱀도 나오는 무성한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 하는 벌초는 솔직히 말해 고통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제(누이 동생의 남편)까지 총동원돼 비 오듯 땀을 흘리다 녹초가 될 무렵 작업이 끝났다.

그 다음 일정은 당연히 시원한 맥주 마시는 것이다. 사실 땀 흘리고 난 뒤 형제끼리 맥주를 마시는 그 재미도 있었다.

벌초가 아무리 힘들다지만 내 부모 내 조부모니까 하는 것이 당연하다. 뭐 요즘엔 벌초 대행업체에 맡기기도 한다. 후손이 고령이거나 몸이 불편한 경우, 해외 출장을 가거나 먹고사는 일에 부대껴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다.

물론 벌초가 힘들어서 인부를 사서 한다는 사람도 보긴 했다. 혀를 차는 사람도 있겠지만 삼복더위에 하는 벌초는 상상 외로 힘들다. 그래서 조금은 이해가 된다. 남을 시키긴 하지만 잊지 않고 산소를 돌보는 그 정성만은 조상님들도 알아주실 것이다.

이제 그마나 우리세대가 지나면 벌초를 하는 광경도 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매장 대신 화장을 해 납골당이나 나무 밑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데다가, 요즘 ‘딸 아들 구별 없이’ 한 명만 낳는 세대가 많아서 조상의 묘를 가꾸기 어려울 것 같다. 제사 풍속도 사라질 것이다. 딸 한명 낳아서 시집보내면 누가 제사를 지내줄 것인가.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다. 사실은 얼마 전 뙤약볕 아래서 프랑스군 참전비 벌초 작업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나는 그날 습기 많고 무더운 날씨 속에 열린 무예24기 마상무예공연 ‘선기대 화성을 달리다’ 행사장인 창룡문 옆에 있었다.

무예24기 수련을 하고 있는 시민의 자격으로 진검을 옆구리에 차고 실전 대나무 베기 시범을 보인 것이다. 잠시 출연했음에도 땀이 줄줄 흐르고 목이 탔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참전비에 자란 풀을 베어내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수원시청 담장자를 욕하지 말기 바란다. 풀이라는 놈은 물기만 먹으면 하루에도 쑥쑥 자란다.  수많은 공원의풀들을 매일 베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제초 작업 전 기념비 앞에서 묵념.(사진=이용창)

이들이 프랑스군 참전비 벌초를 하게 된 것은 한정규 (사)화성연구회 이사로부터 비롯됐다. 한정규 이사는 수원시 시민기자로도 활동하는 매우 부지런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는 지지대고개에 있는 프랑스군 참전 기념비에 갔다가 입구 원형 화단과 좌우 잔디밭에 최근 비가 내린 관계로 부쩍 자란 망초, 쑥 등 잡초를 보게 됐다.

그는 이날 저녁 화성연구회 동료인 김영길씨를 만난 자리에서 벌초를 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단체 카톡방에 제초작업 자원봉사 공고를 했다.

이 결과 8일 아침 10시 기념비 앞에는 이용창 화성연구회 이사, 박영양 박영양산부인과 원장, 조성진 가빈갤러리 대표, 김영길 우표전문가, 한정규 씨와 시청 공무원 등 총 6명이 모였다. 

무더운 날씨 임에도 제초작업에 여념이 없는 화성연구회 회원들.(사진=이용창)

프랑스군은 1950년 11월 29일 부산에 상륙, 수원에서 집결해 '원주 쌍터널 부근 전투', '지평리 전투', '단장의 능선 전투', '화살머리고지 전투' 등을 치렀다. 수원 지지대고개 프랑스군 참전비에는 당시 전사자 26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프랑스군 참전비는 언어와 환경, 문화 등 모든 것이 낮선 땅에 건너와 생명을 바쳐가면서 우리 조국을 지켜준 사람들을 기억하는 역사의 장소인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의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뙤약볕 아래 잡초가 우거진 참전비를 가꾸기 위해 귀중한 휴일을 기꺼이 내준 이용창·박영양·조성진·김영길·한정규 선생,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시청 공직자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대들이 있어 수원살이가 더 행복하다.

김우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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