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가슴 아픈 추억 하나 쯤은 갖고 사실 겁니다.

더욱이 고희(古稀)를 넘나들거나 6.25 전쟁이 끝난 후 어려운 시절을 겪은 분들 한테는 나름대로의 한(恨)이 서리고 눈물 없이는 말할 수도 없는 아련한 옛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이라면 고등학교 학창시절 수학여행과 군대 복무시절의 추억만큼은 각자 밤을 새우면서도 할 말들이 많을 겁니다.

저는 반백년(半百年) 전, 배고프고 어려웠던 과거 고등학교 때 엉겁결에 공짜로 다녀왔던 수학 여행비를 갚기 위해 다시 반백년 만에 ‘두 번째 수학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고교 학창시절 다른 친구들은 가장 설레이며 기다렸던 수학여행 날이 되겠지만 저에게는 가슴이 아리고 민망스러워 아예 오지 않았으면 했던 날이었습니다.

교편생활을 하신 아버지께서 퇴직하시고 출판사를 경영하시다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을 만큼 가정형편이 기울어진 제 사정으로는 수학여행이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사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제가 없으면 재미없는 수학여행이 될 것이라며 몰래 저를 데리고 가려고 묘책 찾기에 나섰지만 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수학여행을 가지 않으려는 꼼수 마련에 몰두했습니다.

결국 친구들의 강권에 말려 수학 여행비를 내지 않고 영문도 모른 채 여행길에 오르게 됐습니다.

담임선생님이신 이상갑 선생님께서 나의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하시고 저와 친구들이 전혀 모르게 수학 여행비를 대신 내주신 것입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성인이 된 뒤 저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하고 선생님을 불편하게 했던 것인 줄을 알게 됐습니다. 뒤돌아 보건데 당시 선생님께서 여러 눈치를 보셔야 했던 고충과 배려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사무친 고마움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택으로 제가 하던 사업도 큰 시련없이 나름대로 잘 됐고, 그러던 차에 선생님의 고마움을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30년차가 돼 선생님을 모실 수 있는 사은회가 있던 날, 현금을 드리면 받지 않으실 것같아 미리 백화점에서 구입한 그런대로 멋진 머풀러를 준비해 ‘30년 만에 드리는 수학여행비’라며 선생님께 전해드렸습니다.

한사코 고사하셨던 선생님께서는 마지못해 받으시고는 며칠 후 모 언론사에 ‘30년 만에 선물로 돌아온 수학여행비’라는 독자칼럼을 기고하셔서 저를 몸 둘 바를 모르게 하셨습니다.

그런 가운데 고교시절, 수학여행을 가지 않고 아낀 돈으로 기타를 구입했던 희상이 친구가 50년 만에 이상갑 선생님을 모시고 옛 친구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제2 수학여행’을 가자고 제의했습니다.

고교시절 그 친구는 수학여행비를 갖고 대신 꿈에 그리던 기타를 샀던 '음악가'입니다.

결국 어언 50여년이 지난 5월, 선생님과 저, 희상, 계원, 흥섭, 선종, 규홍 등 7명은 베트남 꿰논(꾸이넌)에서 사업하는 급우 병관이의 초청을 받아 꿈에 그리던 ‘제2 수학여행’ 길에 나섰습니다.

우리들은 이 여행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반백년 만에 기타를 갖고 싶어 가지 못했던 희상이가 처음으로 가보는 수학여행이 됐고, 저로서는 떳떳하게 비용을 내고 선생님까지 모시고 가는 수학여행이라 생각하니 너무도 뜻깊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과거 경주가 아닌 해외인 베트남으로 여행지가 바뀌었고 인원도 60명에서 7명만 가는 수학여행이었지만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더욱이 공항에 도착하니 베트남에서 사업하는 병관이 친구가 미리 꽃다발까지 준비해 팔순을 맞는 선생님을 축하해주고 여행 내내 가슴벅찬 접대로 끈끈한 사제지간의 정을 만끽하게 해주어 수학여행의 행복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50년 넘게 간직해온 사제지간으로 칠순을 바라보는 제자와 팔순의 선생님이 함께 했던 아름다운 추억의 ‘제2회 수학여행’이 이번으로 끝나지 않고 ‘제3회 수학여행’으로 이어지도록 친구들과 다시 머리를 맞대보렵니다.

지난달 이상갑(왼쪽 5번째)선생님을 모시고 베트남 여행에 함께 나선 제자들. 왼쪽에서 네번째가 필자.
성관모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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