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 고교 3학년 개헌반대 주도… 무기정학까지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부천 소사구)은 중학교 시절 4ㆍ19에 관한 신문을 부친의 어깨너머로 읽으면서 공인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고 3때 3선 개헌반대를 주도해 무기정학을 당했다. 무기정학을 당한 후 하도 억울해서 “선생님과 주변 어른들한테 여쭙고 사회 교과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는 구절은 김문수 의원의 정의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당시 상대)를 입학한 김문수 의원은 이후 25년 동안 도루코노조위원장,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직선제개헌투쟁 등 고문과 구속 세례를 마다않고 자신이 중학교 때 다짐했던 공인의 길을 줄기차게 걸어왔다.

김문수 의원은 청빈한 생활로 유명하다. 아반테 승용차로 첫 등원을 하다가 국회경비들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한 그는 지금도 20년 된 30평대 부천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는 “나도 돈 벌려면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공인은 원래 청빈해야 한다고 교과서에 나와 있지 않느냐? 나는 교과서대로 살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김문수 의원은 지난 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한나라당의 공천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수십억원의 공천헌금을 거절했고 자신을 임명한 최병열 대표를 탈락시켰다. 그 덕에 그가 경기도지사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상당한 인사들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했다. 김문수 의원의 좌우명은 선공후사(先公後私), 멸사봉공(滅私奉公)이다.


▲ 사진 위부터 <1>김문수 의원은 1981년 9월 금속노조 남서울지부 여성부장으로 활동하던 부인 설난영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경찰들은 시위를 가장한 위장결혼으로 오해해 식장 주변에 전경을 대기시키기도 했다. <2>부인 설난영씨와의 즐거운 한때. <3>지난달 20일 파주 LCD 단지를 방문한 김문수 의원 <4>평택항을 둘러보고 있는 김문수 의원 <5>노동운동가에서 의원으로. 서민들이 숨쉬는 삶의 현장은 그에게 마음의 고향과도 같다.
▲ 서민과 함께 하는 일꾼 김문수

김문수 의원의 부지런함은 그의 라이벌도 인정한다. 그의 지역구인 부천에 출마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김문수 만큼만 하라”는 조언을 듣는다고 한다.

김문수 의원의 옆 지역구 의원인 배기선 열린우리당 의원도 사석에서 “나는 지역구에 가면 김문수 만큼만 하겠습니다 라고 인사한다”고 말할 정도다.

대한민국 국회 역사상 김문수 의원 만큼 많은 양의 의정보고서를 만든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김문수 의원은 의정보고서 배포비용을 아끼기 위해 시간 날 때마다 스스로 전철역사에 서서 의정보고서를 나눠준다. 아마 부천에 사는 주민들 치고 김문수 의원이 전철역에서 의정보고서를 나눠주는 장면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덕에 그는 한번도 연임 국회의원이 없었던 부천에서 3선을 했다.

15대 총선 때 한나라당의 자갈밭 부천에서 당시 김대중 총재의 측근인 박지원을 꺾은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10년 국회의원 재임기간동안 단 한번을 제외하고 일 잘하는 국회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김문수 의원과 악수해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놀란다. 그의 손이 매우 거칠기 때문이다. 노동 흔적의 상징인 두툼한 굳은 살이 박혀 있는 그의 손은 1970년대 대한민국을 밑바닥에서 만들었던 노동자의 손이다.

1970년대 프레스 쇳가루와 기름 냄새가 배여 있고 1980년대 독재 정권에 온 몸으로 항거했던 시대정신이 담겨 있는 손이다. 그의 손은 늘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김 의원 자신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들과 눈을 맞추지 않으면 절대 아이들의 눈에 비춰진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김 의원. 

그는 결코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의 위치에 서지 않는다.‘김결식’은 IMF 이후 넘쳐나는 결식아동들의 눈높이에서 결식 예산을 따내면서 얻은 별명이다.

김 의원은 서민들의 곁에서 서민들의 눈높이에서 ‘한다면 하는’ 스타일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지옥철’ 경인선을 개통 100년만에 최초로 복복선을 개통한 일이 대표적인 사례다.


▲ 수도 분할ㆍ수도권규제와의 투쟁

김문수 의원은 “수도권정비법은 대기업 공장을 규제하면서 소규모 난개발을 부추기고 있다. 팔당댐 보호구역으로 묶인 7개 시ㆍ군에서 물만 깨끗하게 유지하면 많은 것을 허용할 생각”이라면서 “수도권 규제를 풀면 첨단외국기업과 국내 대기업이 수도권에 더 많은 투자를 해서 일자리를 더 많이 늘릴 수 있다”고 밝혔다.

김문수 의원은 17대에 들어서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더욱 분명히 표명해 왔다. 지난 대선 기간동안 노무현 대통령의 장수천 의혹을 제기한 탓에 선거직후 여당의 뭇매를 맞고 검찰의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법원은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그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수구적이라는 비난을 받아가며 북한인권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해 왔고 행정수도반대투쟁위원회의 공동의장이 돼 전국을 돌며 행정도시이전 반대투쟁을 지휘했다.

그 덕에 김 의원은 가장 확실한 반노무현 인사로 각인돼 있고 김진홍 목사는 김 의원을 대표적인 뉴라이트 정치인으로 꼽았다.

김문수 의원은 92년 민중당해산과 동구권사회주의 붕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의 표현대로 ‘뼈를 깎는 연옥’을 거쳐 사상 전환을 하게 된 김문수 의원은 지금의 한나라당 전신인 민자당에 입당하게 된다. 이후 당 이름은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바뀌었지만 김문수는 사무부총장, 기획위원장, 이회창 대통령후보특보 등을 역임하며 한나라당을 만들어 왔다.

한나라당만이 대한민국을 선진화시키고 자유민주를 기치로 한 통일 한국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 김문수 의원이 오늘도 쉬지 않고 뛰는 이유다.

              < 김문수가 살아온 길 >

▲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
▲ 경북고 졸업
▲ 전국금속노조 도루코 노조 위원장
▲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민중당 노동위원장
▲ 노동인권회관 소장
▲ 서울대 경영대 졸업 (입학 25년만에)
▲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1998년)
▲ 한나라당 납북자 및 탈북자인권 특별위원회 위원
▲ 15,16,17대 국회의원 (부천시 소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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