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정조 21) 정조는 다산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했다. 2년 전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보내 지역행정을 경험하게 했지만 금정찰방은 백성들을 위한 수령의 자리가 아니라 역원 제도를 위한 금정역의 책임자였다. 출장 다니는 관리들을 위한 말을 키우고 대여해주는 금정찰방은 다산 정약용에게 좋은 경험일 수는 있었지만 고을 행정 책임자로서의 경험은 할 수 없는 자리였다.

다산은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군수와 진주목사를 역임했기에 지방 행정을 어떻게 하는지 간접 경험은 했지만 자신이 직접 수령을 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다산 정약용을 미래의 정승으로 만들기 위해 현장 경험을 해주기로 결정해 그를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한 것이다. 물론 그때 조정에서 천주교 문제가 불거져서 정약용을 잠시 외부로 빼기 위함도 있었다.

곡산도호부는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왕비인 강비의 고향이기도 했다. 따라서 조정에서는 꽤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이었다. 그런만큼 조정에서도 곡산부사는 비중있는 인물이 가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이 부임하기 전 수령이 말도 못할 탐관오리였기에 이계심을 비롯한 백성들의 항의로 고을 수령이 쫓겨 나기까지 했다.

조선시대에 백성들이 고을 수령에 대해 관아로 찾아가서 집단으로 항의하는 일이 거의 없는데 곡산도호부 수령의 너무도 심한 탐학으로 백성들이 민란 수준으로 항거한 것이다.

정약용은 부임하자마자 민란 수준의 항거를 무리없이 해결했다. 비록 조정에서 민란의 주동자 이계심을 용서해준 것 때문에 정약용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정조는 이 의견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약용을 지지하고 그가 정의롭게 수령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국왕의 절대적 지지로 인해 정약용이 곡산부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었지만, 그러나 실제 매우 중요한 난제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재정의 불건전성이었다. 다시 말해 곡산부에 비축된 재원이 거의 없던 것이다. 전임 수령이 하도 관아의 재정을 빼돌려서 돈과 쌀 그리고 면포(옷감)가 남아있지 않았다. 가을 추수 이후 봄이 돼 보리가 여물기 전에 식량이 바닥나 보릿고개가 온다는 시기에 백성들에게 환곡을 대여해줄 쌀도 없는 지경이었다.

다산은 이같은 심각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다양한 고민을 했다. 그 결론이 겨울에 얼음을 만들어 잘 저장했다가 여름에 파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냉장고를 통해 얼음 만드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조선시대는 여름에 얼음을 얻는 일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왕실에서 임금을 위해 내빙고를 만들기도 했지만 이는 극소량일 뿐이었다. 그러니 여름철 얼음은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겨울이 되자 관아 뒷산의 후미지고 음산한 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여러개 파게 하고 그 안에 쌀겨를 깔게 한 뒤 기름종이를 깐 후 물을 붇게 하고 얼음이 되게 얼렸다. 그 위에 다시 쌀겨와 기름종이를 깔게 하고 얼음을 얼렸다. 이런 방식으로 10층 이상의 얼음을 만들게 한 후 마지막 얼음 위에 수십장의 가마니를 깔게 하고 흙으로 덮어 더운 기운이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이듬해 여름이 돼 가마니를 빼고 구덩이를 열자 녹지 않은 얼음이 가득 있었다. 정약용은 호방으로 하여금 이 얼음들을 내다 팔아 부족한 곡산부의 재정을 보충하게 했다.

다산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 관원으로 복귀한 후에 한양의 남산 후미진 곳에서 얼음을 만들어 국가 재정을 보충하자고 했다. 당시 노론 세력들이 정약용이 천주교인이기에 조정에서 나가야 한다고 정치 행위를 하는 바람에 정악용의 정책 건의가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훗날 경세유표에 이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지금  광역이나 기초자치단체장들이 각 지역의 재정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중앙 정부에서 지원받는 것도 한계가 있고, 국민들로부터 추가 세금을 거둘 수도 없다. 이처럼 어려울 때 곡산부사 정약용이 했던 것처럼 창조적인 정책과 실질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재정을 안정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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