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혁의 역사와 현실] 용주사의 비극(悲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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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역사와 현실] 용주사의 비극(悲劇)
  • 김준혁 한신대 교수
  • 승인 2020.08.2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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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한신대 교수. 한국사 전공)

 

용주사(龍珠寺)에 불이 났다. 그것도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패가 봉안된 호성전(護聖殿)에 불이 났다. 용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을 대웅보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가장 중요한 전각은 호성전이다. 왜냐하면 용주사 창건의 의미가 호성전에 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용주사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하여 만든 원찰이다.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묘소 이장의 공역이 끝나자 마자 용주사 건립을 시작했다. 사도세자의 명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찰을 만들자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조가 원찰 건립의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봉안하는 전각으로 호성전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호성전이 용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각이다. 현재도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本寺)이자 효찰대본사(孝刹大本寺)로 불교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찰로 인정받고 있으며, 많은 고승(高僧) 대덕(大德)을 출현시키고 있다.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원찰 뿐만이 아니라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으로 일관되었던 조선시대에 불교 중흥의 시발점이었다. 용주사의 창건은 조선후기 사회에서 불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더욱 초래하였고, 이 영향은 바로 현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 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는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용주사 건립에 보경당 사일 스님의 공로가 컸고, 또한 용주사에 부모은중경을 하사하여 이를 목판으로 만들어 해마다 동지날이 되면 인쇄를 하여 한야오가 경기지역의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용주사는 정조시대 이래 전국 최고의 사찰이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무려 8만7천냥을 모금하여 건립된 왕실사찰이기 때문에 규모는 조선의 제일일 수 밖에 없었다. 용주사 승려들은 화성유수부에서 관할하지 못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고, 승려들의 모든 것을 감사하고 죄를 줄 수 있는 전국 5규정소(糾正所)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僧風을 규정했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였다.

더불어 용주사 주지는 승통(僧統)이라 하여 전국 승군의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하였을 때 용주사 승군들이 군복을 입고 호위하기도 하고, 군사훈련을 위한 대포 발사 훈련도 하였다. 조선 최강의 승군이 바로 용주사 승려들이었다.

근대화 시기 용주사는 일찍이 31본산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80여개의 말사,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현재 절의 신도는 약 7000여 세대에 달하며 정기, 비정기적으로 많은 법회가 이루어지고 또 법회를 통해 교화활동을 행하고 있다. 용주사는 이와 같은 수행자들이 모여 면벽참선하면서 진리를 찾고 한편으로는 다양한 대중포교 활동을 통해 부처님의 지혜를 전하며, 또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 운영을 통해 불자교육을 서원으로 일반인도 누구든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효행교육으로 불교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용주사는 2007년부터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현양사업에 적극적이었다. 용주사가 가진 의미를 다시 재현하는 것이 용주사의 임무라고 당시 새로온 정호 주지스님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2012년 처음으로 ‘정조문화상’을 제정하여 다양한 분야에 노력하는 이들에게 상을 주기 시작했다. 상금만 5000만원에 이르는 거금이었고, 이 모든 비용은 용주사의 시주금으로 해결하였다. 시주와 입장료를 정조 현양 사업에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용주사의 위상은 높이 올라갔고, 지역의 문화 예술인들과 정치인,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용주사에 와서 함께 지역 발전을 위해 논의하는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다른 종교인들도 용주사 방문이 잦았다. 한신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카톨릭대학교, 성공회대학교 총장들이 모두 종교인들이었는데 용주사에 와서 회의를 했다. 종교인 평화회의가 용주사에서 열렸고, 용주사는 소통과 융합의 산실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용주사가 이상하게 변했다. 사찰 주지의 자리를 가지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는 용주사 내분이 일어났다. 승자들은 정조를 잊었다. 용주사가 가진 본래의 중요 기능이 사도세자와 정조의 현양인데 그 일을 잊은 것이다. 용주사가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기일에 제사 지내는 것을 잊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 5~6년이 흘렀다.
 
용주사 호성전의 화재는 단순한 화재가 아니다. 하늘과 정조의 혼령이 우리에게 죽비를 내려 강하게 내리친 것이다. 이제 다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청정한 도량과 공동체를 위한 베품과 소통의 공간으로 돌아가라는 정조의 뜻이 호성전 화재로 나타난 것이다.
 
지혜있는 자들은 알것이요, 무지한 자들은 모를 것이다.

이 화재를 극복하는 모습 속에서 용주사의 미래가 있다. 부디 효찰 대본산으로서의 용주사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바란다. 사도세자와 정조를 흠모하는 모든 이 땅의 국민들이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