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12일 수원과 인천을 잇는 수인선 기차가 다시 운행되기 시작했다. 운행 첫날 나는 수원역에서 수인선 기차를 탔다. 노선이 다시 연결되는 첫날 반드시 기차를 타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기차 안에는 예상 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나처럼 옛 추억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았다.

물론 옛 협궤열차와 같은 낭만은 없었다. 수원역에서 고색역을 지나 오목천역까지는 지하구간이었다. 그 다음부터 사리까지는 지상구간이어서 초가을 농촌 풍경을 감상하며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사리역에서 내려 다시 수원으로 돌아오다가 일부러 오목천역에서 내렸다. 지하역사(驛舍)를 빠져 나왔는데 순간 어리둥절했다. 내 동네처럼 오가던 오목내 풍경이 아니라 아파트로 둘러싸인 낯선 곳이었다. ‘영신여고’라는 버스정류장 안내판을 보고서야 간신히 위치를 감 잡았다. 아, 여기가 진순분 시인이 살던 옛집터이지. 그래 이제 보니 저기 오목내와 수영리 사이 작은 터널도 남아있군.

25년 전인 1995년 12월 31일 수인선 협궤열차가 폐선됐다. 그 전 날인 30일 수인선 열차 안엔 내가 있었다. 폐선되기 전 마지막 추억을 남기려는 사람들로 열차는 만원이었다.

수인선은 일제 강점기인 1937년 7월 11일에 개통됐다. 소금과 곡물을 인천항으로 수송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협궤열차의 철도 폭은 1m도 안 되는 76.2cm였다. 우리나라 표준 궤간이 143.5cm이므로 절반도 안 되는 폭이었다. 열차도 당연히 작았다. ‘꼬마열차’라는 귀여운 이름이 붙었다.

해방 후에는 수원과 인천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으로써 소상인, 직장인과 학생, 농·어민, 관광객들이 주로 이용했다. 내 어머니도 김장철에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소래포구로 새우를 사러 젓갈 냄새, 생선 냄새 가득한 이 기차를 타곤 했는데 가끔은 나도 따라갔다.

서민들의 발이었던 만큼 요금도 매우 저렴했다. 1990년 기준 기본운임 160원, 수원~ 송도 간 운임이 370원이었다. 당시 서울 지하철 기본운임은 250원이었다. 그러니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수인선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것은 내가 수인선 철로가 지나가는 화성시 봉담읍 수영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도 모르고 철로위에 큰못을 얹어두기도 했다. 못이 납작해지면 두들겨서 작은 칼을 만들었다.

어렸을 때는 협궤열차가 소에 받혀 넘어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그냥 ‘소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버스에 받혀 기차가 넘어간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1983년 7월3일 오전 6시50분경 반월지구출장소(현 안산시청) 입구 한양빌딩 앞 고잔 건널목에서 인천 송도를 떠나 수원을 향하던 동차를 시내버스가 들이받아 객차 4량 중 1량이 전복, 2량이 탈선되어 1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신문 기사도 나왔다.

버스와 기차가 부딪혔는데 기차가 전복됐단다. 그만큼 기차가 작았고 철로 사정이 좋지 않았다는 얘기다.

수인선 협궤열차가 폐선될 때 수원시와 화성시, 안산시 일부 구간만이라도 관광열차로 운행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지방정부들이 예산을 나눠서 투자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는데.

비록 정취와 낭만은 많이 사라졌지만 재개통된 수인선을 타는 내내 가슴이 설렜다. 그리고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매년 김장철마다 수인선 협궤열차를 타고 소래포구에서 새우젓을 사오시던 내 어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안계시기 때문이다.

다음엔 소래포구까지 가봐야겠다. 새우젓을 살 일은 없겠지만 수산물시장과 습지를 돌아보고, 오래된 철교도 건너며 가을빛을 즐겨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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