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화성행궁 광장과 인근의 행궁동 일대는 사람들로 넘쳤다. 안심할 때는 아니지만 코로나19 단계가 낮춰지면서, 그리고 가을이 깊어지면서 참지 못한 사람들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우려되지만 사람 사는 맛이 났다.

광교산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보리밥집 자선농원을 지나는데 이집 주인인 김정수가 소매를 잡는다. 김정수는 영혼이 맑고 의리가 있는 친구다. 무엇보다 그가 만드는 휴동막걸리가 아주 맛있다. 서울농대 출신인 가수이자 배우인 김창완도 휴동 막걸리 마니아로서 김정수와 막역한 사이다.

그 막걸리를 한잔했다. 김창완과 아이유가 함께 불러 인기를 끌고 있는 노래 ‘너의 의미’를 흥얼거리며 광교저수지 데크길과 수원천변길을 걸어서 행궁 광장으로 왔다.

화성행궁을 볼 때마다 늘 두 사람이 생각난다. 정조대왕과 심재덕 전 수원시장이다. 행궁은 정조대왕이 만들었다.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파괴했지만 심재덕 전시장이 복원했다. 나도 ‘화성행궁복원추진위원회’ 홍보부장을 맡아 일조했다.

화성행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핵이다. 수원화성은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화성 축성공사에 참여한 장인과 노무자들에게 노임이 지급됐다는 것이다. 내가 축성 공사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를 살펴보니 일반 노무자의 경우 하루에 2전5푼을 지급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두 달(60일) 모으면 15냥이 되는데, 이는 당시 작은 마당이 딸린 5칸짜리 초가집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물가 체계가 지금과 달랐다고 하더라도 고임금이 지급됐던 셈이다.

수원화성의 한 가운데는 화성행궁이 자리 잡았다. 화성이 화성행궁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형세다. 실제로 화성행궁은 수원화성의 모태이자 성내의 중심시설이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면한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 기간 내 화성행궁에서 묵었다.

화성행궁은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건물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다. 1980년대 말, 당시 수원문화원장이었던 고 심재덕 전 수원시장을 중심으로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지역 원로들과 문화계, 학계, 지역사회단체 대표, 언론계 등 각계에서 모인 42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돼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했다. 신풍초등학교에 있던 우화관도 머지않아 복원될 것이다.

화성행궁은 수원화성과 함께 수원이 자랑하는 관광 1번지로서 많은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대장금’ ‘이산’ 등 수많은 텔레비전 드라마와 ‘왕의 남자’ 등 영화를 촬영하는 등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화성행궁 광장도 수원의 역사‧문화‧예술 1번지로서 각광받고 있다. 각종 축제나 행사의 무대가 되는 곳으로 수원시와 시민·사회단체들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는 물론 매일 오전 11시 무예24기 공연 등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린다. 주말에는 산책 나온 주민과 관광객들로 활기가 넘치며 연날리기, 자전거타기 등을 즐길 수 있는 수원의 명소다.

지금도 화성행궁 신풍루 앞에 서 있으면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 올 것 같다. “어이, 김 주간 왔어?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가지?”

그는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심재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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