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인가 2012년 쯤 인가, 수원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어떤 자리에서 수원시인협회 사업으로 버스정류장에 시를 거는 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어느 분인가 발 빠르게 움직였고 그 단체 사업으로 결정됐다. 꼭 우리가 해야 한다는 법이 있나? 아무나 하면 어떤가. 오히려 그분의 추진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대적으로 세가 약했던 우리가 했으면 성사가 안 될 수도 있었다.

어찌됐건 이렇게 해서 버스정류장에 시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수원시 관계자는 수원시가 정조대왕이 실학정신, 개혁정신, 위민정신을 바탕으로 계획적으로 건설한 신도시이며 인문학의 실증적 도시라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문학 도시를 지향하는 수원시가 버스정류장에 인문학 글판을 만들고 시를 게시하는 것은 보기 좋다.

수원시는 2013년 9월5일부터 시민들을 대상으로 공모한 작품들과 관내 등단문인들의 작품을 버스정류장 글판에 게시하기 시작했다. 수원시 버스정류장 인문학글판 창작시 공모는 상·하반기로 나눠 1년에 2차례 진행되고 있다. 시상식을 열어 선정된 학생과 일반시민들을 격려해주기도 한다.

나도 2018년 하반기 버스정류장 인문학글판 창작시 심사를 한 적이 있다. 많은 작품이 응모됐고 우수한 작품들도 많았다.

청소년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율현초등학교 4학년 정은후 학생의 작품이 기억에 남는다. ‘어른들은 몰라요’라는 시인데 순수한 동심의 세계가 잘 표현됐다. 읽으면서 저절로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동생과 내가 싸우면/먼저 울어버리는 내 동생/우리 아빠 달려오시며/동생을 달래주신다//어른들은 모른다/누구의 잘못인지/어른들은 모른다/나도 울음을 참고 있다는 걸//들쑥날쑥 내 어깨 위에/가만히 내려앉은 손 하나/툭툭 쳐주시는 아빠의 손길에/마음이 사르르 녹아 내린다’-시 ‘어른들은 몰라요’ 전문

버스를 기다리거나 산책을 하다가 이런 시를 읽으면 행복해진다.

2016년 일반부 최우수상으로 선정된 이대규 씨의 ‘저물녘’이라는 시도 기억에 남는다. 작품을 구할 수는 없으나 저물녘 귀갓길에서 만난 노점상 할머니의 이야기를 쓴 따듯한 작품이었다. 이대규 씨는 현재 수원문인협회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 시도 두어 편 걸려 여기저기서 문자나 전화를 받았다. 어떤 이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기도 한다. 아마 다른 이들도 그러하리라. 보는 시민들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주 긴장하곤 한다.

얼마 전에도 ‘2020년 하반기 버스정류장 인문학글판 창작시 공모’ 입상작이 발표됐다. 응모작 187편(일반부 85편·청소년부 102편) 가운데 선정위원회 심사를 거쳐 일반부 15편, 청소년부 20편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심사위원들이 최우수작으로 뽑은 작품은 ‘화령전’으로서 아마추어치고는 제법 매끈한 글이었다. 많이 써 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봄 햇살 화령전 처마 끝에 나붓이 앉는다/ 개나리 철쭉 손짓하며 살랑이고 /벙글어진 모란 눈 흘긴다’

여기까진 잘 흘러갔다. 그런데 다음 부분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정조의 효심 배어 있는 뜨락/ 혜경궁 홍씨 회갑연 춤사위 너울대고/ 장구소리에 구성진 육자배기 어깨춤이 더덩실/ 효심에 활짝 핀 꽃잎 속/ 정조의 곤룡포에 내려앉은 나비/ 별과 달이 어우러져 불 밝히는 화성의 하늘/ 대대손손 웃음소리 만고에 울려 퍼지리라’

정조대왕의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이 열린 곳은 ‘봉수당’이다. 그리고 ‘화령전’은 정조대왕 서거 후 정조 어진을 모신 ‘제사 공간’이다. 즉 뚱땅거리고 잔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화령전에서 ‘혜경궁 홍씨 회갑연 춤사위’라니, ‘장구소리에 구성진 육자배기 어깨춤 더덩실’이라니...

어머니(혜경궁)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정조)의 어진을 모신 장소에서 그 어머니의 흥겨운 회갑연을 한다니 말문이 막힌다. 이를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둘러 댈 수 있을까.

아마도 글 쓴 이는 화령전을 화성행궁 봉수당으로 착각했음이 분명하다.

어찌됐건 수원시는 이 시를 버스정류장에 내걸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 볼까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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