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광교산에 갔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의 산행이다. 어느 때부턴가 오르는 것은 괜찮은데 내려오는 계단길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산행보다는 산 둘레나 골짜기를 따라 걷는 산책을 위주로 하고 있다. ‘관절 보호’라는 핑계로.

언론계 대선배로서 MBC기자, 경기일보 대표이사 사장, ㈔경기언론인클럽 초대 이사장, 수원시의회 의장, 경기문화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한 홍기헌 재단법인 경기도언론인장학회 이사장은 한때 나를 ‘광교산 산신령’이라고 불렀는데...‘세월에 장사 없다’란 말은 진리였다.

팔달문에서 수원천을 따라 걸어서 광교산 버스종점을 지나 헬기장까지 갔다 다시 팔달문까지 되돌아오는 길은 제법 길다. 그래서 가끔 걷다가 피곤해지면 옛 예비군 훈련장, 지금은 야구 훈련장과 여자축구선수들 숙소 옆 보리밥집 ㅈ농원에 들러 이 집 주인이 직접 만들어 파는 청국장을 안주로 막걸리를 한잔하기도 한다. 주인은 지역 후배인데 가끔씩 자신이 직접 제조한 막걸리를 서비스라며 슬그머니 상위에 놓고 간다. 한두 병 씩 배낭 안에 넣어 줄 때도 있다. 이 막걸리가 명품이다. 가수이자 탤런트인 김창완씨도 이 막걸리 마니아여서 가끔 이 집에 와서 마시고 수십 병씩 사가기도 한단다.

이 날은 그냥 지나쳤다. 코로나19 상황이긴 하지만 새해 첫날이라고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혼자 자릴 차지하고 있으면 주인장에게 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국장 생각을 해서인지 급작스레 허기가 진다. 아침을 너무 일찍 먹은 탓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벌써 오후 2시나 됐다.

서둘러 내려오다가 연무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예전에 지나오면서 몇 군데 식당을 눈여겨 봐두었기 때문이다.

수원 연무시장 한 통닭집에 걸린 현수막.(사진=수원일보)
수원 연무시장 한 통닭집에 걸린 현수막.(사진=수원일보)

그런데 어느 통닭집에 걸린 작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착한 임대인 임대료 감사합니다”

“감사이벤트, 치킨 포함 전 메뉴 4000원 할인”

“우리함께 이겨내자! 코로나!”라는 글귀와 함께 그림도 보였다.

아마도 해병대 출신인 듯, 정복 차림으로 힘차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고마움을 표시하는 치킨집 주인은 그림 속에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 고마운 마음이 전해졌다. 내 눈시울도 덩달아 시큰해졌다.

생각해 볼 것도 없었다. 여기서 통닭에 생맥주나 한잔 하자고 마음먹고 문을 밀었더니 잠겨있다. 아, 아직 문을 열 시간이 안됐구나.

‘착한 임대인 운동’은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소상공인들의 건물 임대료를 깎아주자는 움직임이다. 올해 초부터 이 운동이 벌어져 많은 건물주들이 참여했다. 고통을 나누자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건물주들이 착한 임대 운동에 동참했고 세입자들의 고통이 다소나마 줄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최근 이런 착한 임대인을 찾기 힘들어졌다고 한다. 자영업자들의 폐업이 이어졌고 빈 점포가 부쩍 늘었다. 건물주들은 임대 소득이 감소됐다. 건물주들의 희생을 더는 기대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이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확산에 건물주, 세입자 할 것 없이 힘든 겨울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감하게 임대료를 인하해 준 건물주들이 있으니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인천 서구 청라동의 착한 건물주에게 세입자인 식당 운영자가 감사의 뜻으로 내건 현수막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착한 건물주님! 코로나19 끝날 때까지 임대료 면제 감사합니다. 고객님께 이 고마움을 나눌 게요. 앞으로도 쭉 설렁탕, 굴국밥, 소고기국밥 5000원씩 판매하겠습니다.”

이 현수막을 내건 식당 운영자가 “주위 건물주님들에게 눈총을 좀 받고 있다”고 말했지만 너나없이 어려운 이 시기에 누가 건물주들을 욕할 수 있을까.

저녁엔 연무시장 그 통닭집에 다녀와야겠다. 많은 친구들을 부르지는 못하겠지만.

고통도 고마움도 함께 나누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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