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서문 앞을 통과하는 화성열차,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서문 앞을 통과하는 화성열차,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성열차 도입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후 4년차가 되던 2001년이었다. 아이디어는 (사)화성연구회에서 비롯됐다. 화성은 세계유산이 되자 국민들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관광객이 늘기 시작했다. 관광객 가운데엔 젊은 사람도 많았지만 노약자계층도 많았다.

화성은 평산성으로 이뤄진데다가 성곽의 둘레는 5.7km라서 노약자들에게는 부담이 되는 거리다. 성곽 또한 편의시설이 제대로 갖춰 있지 않아 화성을 한 바퀴 순례하기에는 멀고 지루한 거리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노약자를 편하게 모시고 청소년층에게 흥밋거리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 구상한 것이 걷지않으면서 화성주변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일명 ‘코끼리차’를 운행하자는 의견이 모아지게 됐다.

당시 조회해보니 국내에서 코끼리차를 운행 중인 곳은 아홉 곳이었다. 그 가운데 수원과 여건이 비슷한 곳을 파악하니 독립기념관과 여수 오동도, 과천 서울대공원, 인천대공원, 부산 태종대였다. 도시계획과장인 나와 최준호 도시시설팀장, 박표화 주무관과 함께 출장에 나섰다.

직원들의 출장소감을 종합한 결과 부산 태종대에서 운행 중인 부비열차가 우리가 도입할 수 있는 모델이라고 결론이 났다. 부산 부비열차를 추진한 관련서류를 이미 부산 출장 때 모두 협조를 받아 왔던 터라 즉시 추진이 가능했다.

사실 화성열차를 도입하자는 의욕만 앞섰지 실제로 준비된 것은 전무한 실정이었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내부 방침을 받아야만 진행이 가능했다. 부산시의 사례를 참고삼아 계획서를 만들었는데 당시 4량짜리 차량 2대에 7억원, 도로3.2km를 정비하는데 8억원이 드는 것으로 파악이 됐다.

당시 심재덕 시장이 정치적 모함으로 인해 영어(囹圄)의 몸인 상태였기에 당시 수원시장 직무대행으로 있던 이무광 부시장에게 보고하니 "시장님도 안 계시는데 어려운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겠느냐"고 몇 번을 되묻다가 실무진 의지를 파악하고는 결재를 해줬다.

문제는 돈이었다. 관공서의 예산은 전년도 10월경에 마무리가 돼서 의회의 승인을 받어야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런데 화성열차는 2001년 중반쯤 시작을 했으니 2002년 예산에 반영해 추진해야 했다.

그래서 묘안을 찾게 됐다. 경기도 예산을 보조받으면 이같은 절차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생각이 났다. 그래서 경기도청을 통할 수 있는 루트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몇 년 전에 퇴직한 우연히 김홍진 선배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화성열차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랬더니 당시 홍승표 경기도 문화정책과장(용인시부시장, 경기관광공사사장 역임)을 소개해 주는 것이 아닌가.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경기도청을 찾아 홍 과장에게 설명을 하니 '100% 공감한다'는 말을 듣게 됐다.

그로부터 1주일 쯤 지났을 때, 7억원을 보조해주라는 도지사의 결재가 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참으로 하늘로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도비 7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다음 급선무는 2002년 예산에 나머지 8억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이미 국·도비를 확보한 경우 큰 문제가 없는 한 예산 확보는 문제될 것이 없어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이어 막바로 차량제작 및 화성열차 노선설계 용역을 착수하게 됐다. 차량 모델은 여러 가지 안이 있었으나 정조대왕을 상징화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화성열차의 머리는 임금을 상징하는 용머리를 형상화하기로 결정했다. 객차 3량은 정조대왕의 어가(가마)를 형상화하기로 했다. 용이 끄는 어가인 셈이다. 화성열차를 타는 손님을 임금님 대접을 해드리겠다는 컨셉이었다.

제작중인 화성열차 용머리 모습. 오른쪽 옆은 화성열차 객차.(사진=화성사업소)
제작중인 화성열차 용머리 모습. 오른쪽 옆은 화성열차 객차.(사진=화성사업소)

2002년, 도비 7억원과 시비 8억원이 확보됐다. 열차 2대를 만들게 됐고 차량제작비는 1대당 약 3억원으로  2대를 만드는데 6억원이 소요됐다.

하지만 화성열차 노선을 정비하는데 약 9억원이 필요했다. 월드컵축구 경기가 얼마 안남은 2002년 2월경이었다. 행정자치부가 월드컵이 열리는 시.군에 국비지원사업을 공모했다. 당시 경기도의 담당은 경제항만과 였는데 박제향 과장(후일 경기도 자치행정국장 역임)이 직접 공문을 갖고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래 밑져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하고 화성열차 사업을 제출했다. 참으로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과 같이 화성열차 사업이 국비지원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8억원을 지원받게 됐다.

화성열차 도입사업을 수원시 예산 1원도 들이지 않고 추진하게 된 것이다. 당시 홍승표 경기도 문화정책과장과 박제향 경제항만과장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첫 시험운행은 수원에서 열리는 월드컵축구 게임기간에 진행하게 됐다.  2002년 6월24일 시험운행을 마치고 정식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유는 왜 한국식이 아닌 중국 냄새가 나는 빨간 색깔을 택했냐는 것이었다. 중국 냄새가 너무 난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월드컵 축구전에서 한국팀이 연승을 거두며 4강까지 진출하자 붉은 악마부대가 거리를 메우게 됐고 그런 빨간색의 거부감이 사라지게 됐다.

외교사절단을 태운 빨간 색깔의 화성열차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외교사절단을 태운 빨간 색깔의 화성열차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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