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공고 전경.(사진=수원공고)
수원공고 전경.(사진=수원공고)

오늘로 수원살이 50년이 되는 날이다. 1971년 3월 2일 수원공고 입학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이 되면서 수원에서 살고 있는 큰딸(큰누님)과 장남(맏형)으로부터 수원에 공고가 생긴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님은 막내아들만은 농사꾼을 만들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 1년 전 시집간 큰딸에게 나를 맡겨 수원공고에 다니게 했다. 큰 누님은 아들만 5형제를 낳으셨는데 나까지 합류해서 ‘아들 여섯’을 키우신 것이다. 당시는 3공화국시절이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부존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수출밖에 없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공업발전이 전제가 돼야 했으므로 공업입국을 기치로 내세우던 시기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에 힘입어 공업학교를 세우는 운동이 일었다. 이때 수원공고가 설립됐다. 수원의 터줏대감인 망천(忘川) 이고(李皐) 선생(고려 말 한림학사)의 후손들이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대대로 물려받은 종중재산을 출연해 학교를 세운 것이다.

입학 하던 날 학교 모습은 참으로 황량했다. 산을 깎은 언덕위에는 한 층에 교실 7칸씩 3층 건물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뒤편에는 나중에 증축을 하려는 것인지 철근이 삐죽삐죽 나와 있는 모습의 건물이었다.

수원공고 초창기 교문.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수원공고 초창기 교문.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학교 운동장은 말이 운동장이지 자갈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입학을 한 후 운동장 고르기를 3년 내내 했다. 당시 수원공고는 토목과 2개반과 건축과 1개반으로 신입생을 모집했다. 나는 사실 토목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토목과에 지원했다. 건축과는 1개 반을 뽑는데 토목과는 2개 반을 뽑아 경쟁률이 조금 낮을 것이라고 생각해 토목과와 인연을 맺게 됐다.

토목(土木)이라 함은 주로 땅을 기반으로 목재, 철재, 토석 등을 써서 도로, 교량, 항만. 제방, 댐, 철도, 건물, 상하수도 등 가반시설을 만드는 공사를 말한다. 과거 세분화되기 전에는 도시계획과 지도제작 등도 토목의 분야에 포함됐다.

토목은 측량에서 시작된다. 측량을 해서 작성된 현황도(지형도)는 설계의 기본이다. 이어 건설하고자 하는 위치의 종·횡단(높고 낮은 측량) 측량도면에 만들고자하는 공사도면을 작성한다. 그리고 물량을 산출해 내역서를 만들면 설계도서가 된다. 설계도는 투명지에 제도를 해 청사진(오늘날은 프린터로 출력)을 뽑으면 완성이 된다.

개교20주년을 맞아 동창회에서 세운 교훈비. (휘호 및 사진 =필자 김충영)
개교20주년을 맞아 동창회에서 세운 교훈비. (휘호 및 사진 =필자 김충영)

나는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다. 하지만 제도와 글씨 등은 성격상 꼼꼼한 편으로 나름 적성에 맞았던 것 같다. 담임인 염재관 선생님께서는 나를 포함한 친구들(노종대, 이일근, 장희창)을 관심있게 지켜보셨다. 어느 날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불러 가보니 우리 학교가 새로 개교한 학교라서 학습에 필요한 교안 차트 등이 전혀 없으니 너희들이 좀 도와 달라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틈틈이 교안을 만드는 일을 도와 드리며 학교생활을 했다. 우리들은 이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이 구성됐다. 우리 그룹 중 노종대는 수원공고와 담장이 붙어있는 인계초등학교와 수원북중을 졸업하고 수원공고로 진학을 했다. 그 친구의 집은 당시 KBS수원송신소 입구에서 화분공장을 했다.

친구는 인계초등학교 옆에 있는 무덕관 소속 화랑체육관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해 3단을 보유한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태권도부 활동을 하게 되면서 학교 수업이 끝나면 당시 엄기섭 관장이 운영하는 태권도 도장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1973년 전체 조회 모습. 멀리 개발되기전 동수원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공고)
1973년 전체 조회 모습. 멀리 뒷쪽으로 개발되기전 동수원 모습이 보인다. (사진=수원공고)

수원공고는 구시가지 화성(華城)의 남동쪽 동산에 위치해 있었는데 당시는 수원시 인구가 17만 명 정도였던 시절이었고 수원공고는 시가지 외곽에 위치했다. 학교의 남쪽에는 실개천인 장다리천이 있었는데 하천 양옆으로는 논이 형성됐다. KBS수원송신소(현재 KBS수원센터) 부근은 딸기밭과 복숭아 과수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고2때 방학 때의 일이다. 우리들은 저녁 늦게까지 운동을 했는데 친구 한명이 장난기 어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복숭아 서리였다. 그런데 전제 조건이 있었다. 주인에게 들키지 않으려면 윗저고리를 벗고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복숭아밭 근처까지 가서 윗저고리를 벗어 소매를 묶자 자루가 됐다.

이어 사주 경계를 하고는 주인이 원두막에서 코를 고는 소리를 확인하고는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복숭아를 10여개씩 따가지고 도장에 왔는데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친구의 등을 보자 모기에 물린 자국이 수십 개나 됐다. 우리들은 복숭아 몇 개를 서리한다고 우리 몸을 모기에게 보시를 한 꼴이 됐다.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해마다 5월이면 학교 체육대회가 열렸다. 일반 종목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했지만 마라톤은 학교 앞 마을길을 한 바퀴 도는 코스였다. 학교정문을 나서서는 KBS송신소 앞을 거쳐 인도래를 거쳐 온수골(경기아트센터인근)을 거쳐 권선리(현재 수원시청 앞)을 거쳐 논뜰(현재 권선초등학교)거쳐 수원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인계동 마룻길을 거쳐 학교를 들어오는 구간을 뛰었던 생각이 난다.

1978년부터 동수원개발계획이 수립돼 1980년대 본격적으로 개발이 되면서 이제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 때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은 시청 앞의 올림픽공원 동산뿐이다. 당시 1971년 수원에는 여섯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다. 학교가 문을 연 순서를 살펴보면 삼일실업고등학교, 수원고등학교, 수원여자고등학교, 수원농림고등학교, 수성고등학교, 매향여자고등학교, 그리고 막내인 수원공업고등학교였다.

당시 5월이면 수원시 체육대회가 개최됐다. 말이 수원시 체육대회이지 학교대항 체육대회 수준이었다. 1971년 수원시 체육대회는 세류초등학교에서 개최됐다. 수원시 공설운동장(흙경사면에 스탠드조성)이 1971년 10월에 완성돼 이 때까지 수원시는 공설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세류초등학교는 제법 여러 단으로 만들어진 스탠드가 있어서 학교별로 구역을 나누어 학교별로 배치하기 편리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학교가 개교 첫해이다 보니 학생수가 180명밖에 되지 않아 스탠드 맨 끝쪽에 배치가 됐다. 아무리 응원가를 불러 봐도 소리가 들리지도 않아 우리 학교 학생들은 주눅이 들 수 밖에 없었다. 서러움이 해소된 것은 2년 후 수원공설운동장에서 열린 1973년 체육대회다. 그 때는 이미 학생수가 3학년까지 9개 학급 540명으로 늘어나게 됐다. 당시 공설운동장 스탠드에서 카드섹션을 하기도 했는데 그제서야 수원공고의 존재감이 서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일화 하나만 더 소개하자. 당시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20년쯤 되는 시기라서 반공이 국시(國是)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교련(敎鍊)을 받았다. 제식훈련, 총검술, 중량운반, 응급조치, 화생방 등을 군인수준으로 했던 기억이 난다.

민방공훈련의날 수원공고 화생방훈련모습.(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민방공훈련의날 수원공고 화생방훈련모습.(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어느덧 3학년 2학기가 됐다.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2학기가 되면 현장실습을 나갔다. 현장실습은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학교에서 익히기 어려운 현장 실무를 익힌다는 것. 또 하나는 현장실습이 취업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가보니 농촌진흥청 산하 농업기술연구소 토양물리과에서 공문이 왔다고 했다. 토양도를 만드는 사업인데 제도를 잘하는 사람을 보내 달라 했다면서 가보겠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생각해보겠다고 말씀을 드리고는 주위사람들과 이야기해보니 어떤 일인지도 모르니 한번 가보고 결정하라고 조언했다. 고민 끝에 농촌진흥청에 한번 가보기로 했다. 이런 인연으로 1976년 9월 군입대하기 전까지 농촌진흥청을 다니게 됐다. 이것이 내 사회생활의 첫 길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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