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9년 수원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여러 가지 행사와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나는 ‘수원시 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해 현장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기억하는 백 년의 울림! 기약하는 백년의 미래!’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3월 1일 낮 12시부터 열렸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와 6월 2일~5일 중국 상해·항주 항일유적지 탐방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는 3월1일 정오, 방화수류정과 수원역에서 출발하는 시민참여 만세 행진에 이어 화성행궁에서 주제공연과 100주년 기념식과 전시·체험행사 등이 열렸다.

방화수류정은 수원지역에서 가장 먼저 3.1만세 함성이 울려 퍼진 곳으로 이곳에서 출발한 2300여 명의 ‘독립군’들은 만세를 외치며 왜정 때 경찰서가 있었던 화성행궁까지 행진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수원역에서도 1500여 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수원소년군’이 화성행궁 광장으로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2019년 3월 1일 열렸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
2019년 3월 1일 열렸던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사진=수원시포토뱅크)

오후 2시에는 화성행궁광장에서 김세환, 이하영, 조안득, 박선태, 이선경, 임면수, 김향화, 김장성, 홍종철 등 수원지역 독립운동가 9인을 기억하는 주제공연 '수원, 그날의 함성'도 공연됐다.

수원 3.1운동 주제 홍보관, 태극기 특별전시관, 1919 문화체험관, 미래체험관 등 부대행사도 볼만했다.

수원지방은 3.1운동의 3대 항쟁지로 불린다. 평안북도 의주, 황해도 수안과 더불어 수원이 꼽힌다. 일부에서는 안성지방도 3대 항쟁지에 넣고 있지만 그런들 어떤가. 4대 항쟁지가 된들 어떠랴.

바로 그날, 1919년 3월1일 수원 방화수류정 부근에서 김세환 선생 등이 주도, 수백 명이 만세를 불렀다. 학자들은 이 만세 시위가 전국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가는 기폭제가 됐다고 한다.

수원지방의 3.1운동은 농민과 노동자, 상인, 지식인과 심지어는 기생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한 독립운동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수원지역의 항쟁역사는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이선경, 김향화, 김세환, 임면수 등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어 다행이다.
 
나와 오랜 교유를 하고 있는 임병무 시인은 필동 임면수 선생의 손자다. ‘독립군의 후손들은 3대가 가난하고 친일파 후손들은 3대가 호강 한다’라는 말이 있다. 가슴 아프게도 그는 3대째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뇌수술을 받은 후 말과 행동까지 어눌해져 어디 취직도 못한 채 60세 후반의 세월을 살고 있다.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는 할아버지 임면수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임시인은 할아버지 얼굴을 꼭 빼닮았다.

지난 2015년 광복70주년을 맞아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 제막식. 필동선생의 친손자인 임병무 씨(동상 왼쪽)와 부인(동상 오른쪽), 염태영 수원시장(임병무 씨 옆) (사진=필자)
지난 2015년 광복70주년을 맞아 수원시청 앞 올림픽공원에서 열린 독립운동가 필동 임면수 선생 동상 제막식. 필동선생의 친손자인 임병무 씨(동상 왼쪽)와 부인(동상 오른쪽), 염태영 수원시장(임병무 씨 옆) (사진=필자)

몇 년 전 (사)화성연구회에서 백두산 인근 항일 독립군들의 발자취를 찾아 가는 답사여행을 할 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영하 30도의 추위는 예사인 백두산 산간 마을에 어느 날 밤 독립군 한명이 찾아들었지요. 그는 주민에게 돈을 주며 먹을 것과 신발, 옷가지를 달라고 했어요. 그러나 주민은 일본군에 신고했습니다. 독립군은 산으로 피신해 총격전을 벌이며 저항했지만 결국 총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시신을 해부했습니다. 이 추운 겨울 산속에서 도대체 무얼 먹고 살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의 위에서는 곡기는 한 톨도 없이 사람이 먹기 힘든 풀뿌리와 나무껍질만 발견됐다고 합니다. 신발도 다 해져 거의 맨발이나 다름없었다지요.”

 
임면수 선생의 큰 아들도 독립군 자금을 운반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 돌아가는 길, 만주에서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동사했다. 우리 선열들의 독립투쟁은 이런 고난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도 친일청산은 이뤄지지 않았다. 역사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아직도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하고 있다. 요즘말로 ‘토착 왜구’라는 세력까지 함부로 날뛰고 있다.

 
다시 3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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