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후보를 찍은 투표지를 40% 정도 채워 놓은 상태에서 투표를 한다. 그 결과는 뻔하다. 투표가 끝난 뒤 투표함을 몰래 바꿔 보내기도 했다. 이것이 이른바 ‘4할 선거’ ‘투표함 바꿔치기’라는 것이다.

‘3·7·9인조 공개 투표’라는 것도 있었다. 선거 방식을 알려준다는 명분으로 조를 짠 다음 강제로 특정 후보에게 찍도록 유도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배들을 동원한 협박, 납치, 폭행도 자행됐다.

‘올빼미표’ ‘피아노표’란 것도 있었다. 개표 과정에서 불을 꺼 투표함을 바꿔치기 하는 것이 올빼미표다. 검표원이 손가락에 인주를 찍고 피아노를 치듯 상대방 투표지에 찍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그 표는 무효가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유당 시절 1960년 ‘3.15 부정선거’였다.

이에 마산에서 시민들이 일어섰다. 학생들도 학교에서 뛰쳐나와 시위대열에 합세했다. 부정선거의 무효를 외치는 지극히 정의로운 시위였지만 경찰은 폭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다.이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3.15의거 기념탑. (사진=창원시청 홈페이지)
3.15의거 기념탑. (사진=창원시청 홈페이지)

결정적인 사건은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시위에 참여한 후 실종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올랐다.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 사진은 신문에 그대로 보도됐고 분노한 시민들은 시청, 경찰청, 군청을 습격했다.

1차 의거에서 9명, 2차 의거에서 3명 등 총 12명이 사망했다. 250여 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하거나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분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3.15의거’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고 정의는 승리했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한 데 이어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나는 그때 우리나이로 네 살이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봄날 이웃집 원순이라는 여자아이와 돼지우리 아래 햇볕 좋은 언덕에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긴장한 얼굴로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남문 일대가 데모행렬로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4.19였다.

그리고 1년 뒤 4.19 때보다 더 긴장한 표정의 어른들이 불안한 목소리로 군인들이 정권을 잡았다고 수군댔다. 5.16이었다.

그러니까, 3.15의거, 4.19혁명으로 흘린 국민들의 피의 결실을 군부가 가로채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군사독재 정권이 한국을 지배했고 국민들은 ‘겨울 공화국’에 갇혔다.

고등학교 때 우리 집에선 동아일보를 구독했는데 어느 날부터 곳곳이 텅 빈 백지 상태로 나왔다. 광고도 없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이 극심해졌다.

그때 고등학생인 나도 500원인가를 내고 한 두 줄짜리 광고에 참여했는데 국민들의 동아일보에 대한 성원은 대단했다.

그때 그 신문에 양성우의 시인의 ‘겨울 공화국’이 실렸다.

<겨울공화국>

여보게 우리들의 논과 밭이 눈을 뜨면서/뜨겁게 뜨겁게 숨쉬는 것을 보았는가/여보게우리들의논과밭이가라앉으며/누군가의이름을부르는것을들으면서/불끈 불끈 주먹을 쥐고/으드득 으드득 이빨을 갈고 헛웃음을 껄껄껄/웃어대거나 웃다가 새하얗게 까무러쳐서/누군가의 발 밑에 까무러 쳐서/한꺼번에 한꺼번에 죽어가는 것을 보았는가//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군화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 대는/지금은 겨울인가/한밤중인가...(중략)...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부끄러워라 잠든 아기의 베게 맡에서/결코 우리는 부끄러울 뿐/한 마디도 떳떳하게 말할 수 없네...(중략)...우리들을 모질게 재갈 물려서/짓이기며 짓이기며 내리 모는 자는/누구인가 여보게 그 누구인가/등덜미에 찍혀 있는 우리들의 흉터,/채찍 맞은 우리들의 슬픈 흉터를/바람아 동지섣달 모진 바람아/네 씁쓸한 칼끝으로도 지울 수/없다...(중략)...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한사코온몸을 버둥거려야/하지 않은가/여보게

결국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전두환 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했고 다시 겨울이 시작됐다. 국민들은 또 다시 들고 일어났다. 5·18민주화운동에 이어, 6월 항쟁이 들불처럼 번졌다. 전두환 정권은 6.29선언을 해야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 현대사는 참 드라마틱하다. 일부러 허구를 개입시키지 않아도 그냥 대하소설 같다.

미얀마 현대사 역시 우리와 꼭 닮았다. 지금 미얀마에서는 우리나라 1980년 광주와 흡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어제(14일) 하루 만 해도 미얀마 시위 참가자 중 최소 38명이 군경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로이터 통신은 보도하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미얀마 국민들을 응원하고 있다. 자유, 민주, 정의를 외쳤던 ‘3.15 의거’에 이은 ‘4.19혁명’, ‘부마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6월 항쟁’ 때 흘린 피가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를 세웠듯이 미얀마 국민들이 그동안 뿌린 피도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밑거름이 될 것으로 믿는다.

오늘 3월15일, 61년 전 마산에서 일어났던 3.15의거를 생각하며 반드시 오고야 말 ‘미얀마의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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