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교수신문은 올해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뽑았다.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뜻이다. 나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도덕적인 잣대가 다를 때 쓰는, 소위 '내로남불'의 한자(漢字)식 표기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사자성어는 아니다. 한자식으로 바꾼 일종의 신조어인 셈이다.

 역대 선거중 내로남불이 가장 이슈화된 선거는 아마 지난 재보궐선거가 아니었나 싶다.오죽하면 중앙선관위가 내로남불이 특정 정당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선거용 문구사용을 제한, 논란까지 빚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 언론에도 소개됐다. 뉴욕타임스가 4·7 재·보궐 선거의 여당 참패 원인으로 내로남불’(naeronambul)이라는 말을 꼽았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유명세로 이제 국제적 통용어로 등재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불명예스러운 단어의 국제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민낯’을 표현하는 국제식 표기는 의외로 많다. 갑질(gapjil)이 대표적이다. 뉴욕타임스가 3년 전 국내 재벌 일가의 ‘물컵 사건’ 때 한국어 표현 그대로 쓴 뒤 외국어 사전에 등재됐다.

 그런가 하면 영국 BBC는 재작년에 한국어 ‘꼰대’(kkondae)를 ‘오늘의 단어’로 소개하기도 했다. “자신은 항상 옳고 남은 틀리다고 주장하는 나이 든 사람”이라며 부정적인 뉘앙스의 한국어라 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984년경으로 사회학자들은 유추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준말의 ‘내로남불’이라는 문구가 모 주간지에 등장한 것이 효시라는 것이다. 

 그 후 1987년 이문열의 소설 ‘구로 아리랑’에서도 이 말이 사용되기도 했으며 1990년대들에 본격적 유행이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어느 여당 정치인이 국회 발언을 통해 “내가 땅을 사면 투자요 남이 땅을 사면 투기”라고 일갈한 것이 수많은 ‘패러디’를 낳게 됐다는 것. 그후 예를 들 수 없을 정도의  패러디가 나왔다. 각 분야를 총망라해 촌철살인하는 문구들도 부지기수다. 

그렇게 진화한 내로남불 패러디가 가장 봇물을 이루었던 시기는 아마 요 몇 년 사이가 아닌가 싶다. 검찰개혁과 더불어 조국사태와 관련, ‘조로남불’이 등장했고 토지공사 직원들의 땅투기가 불거지며 ‘LH로남불’이 끝판왕으로 등극해서다.

 사정이 이러하자 선거 참패후 꾸려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는 일성(一聲)으로 “내로남불의 수렁에서 하루속히 빠져 나오겠습니다” 라며 더 꾸짖어달라고 민심에 호소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에게는 너그러운 잣대를 들이대고 남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내로남불은 권력자, 특히 정치인들의 전유물이 되어왔다. 하지만 그게 어디 권려자 정치인들뿐만 이겠는가. 세상이 변하며 일반인들도 '내로남불'에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 없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성경구절이 다시금 생각나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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