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불양수(海不讓水)’ 즉, ‘큰 바다는 어떠한 물도 사양하지 않는다’라는 좌우명을 갖고 한국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한동 전 국무총리.

그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의회주의자로도  정평이 난 경기도출신 거물 정치인이었다.
 
잔 수를 쓰지 않는 큰 정치인으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별칭도 많다. 우직하지만 호탕함과 논리 정연함을 갖춘 호걸형 장부(丈夫), 찬화력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은 맏형,

모두가 남들은 한 번도 하기 힘든 집권당의 원내총무를 세 번씩이나 거치면서 얻은 별칭이다.

훗날  동료들은 이런 그를 보고 ‘이한동 총무학’이란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결단력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판단이 서면 그 굳힌 결심을 단칼에 시행해서다. ‘일도(一刀)’라는  그의 호(號)가 이를 말해준다.

김영삼, 김대중 등 전직대통령들이 최고의 정치인이라 입을 모았던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10.26사태의 산물인 민주정의당에서 국회의원을 시작했다.

1980년 정치에 입문해 1981년 총선부터 내리 6선을 한 것이다.

그는 이후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기며 정치적 역랑과 기반을 다졌다.

그의 평소 또 다른 좌우명 진인사 대천명(眞人事 對天命), 덕필유린(德必有隣 : 덕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이 많아 외롭지 않다)을 실천한 결과인지 모르지만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세 차례에 걸쳐 원내총무를 맡을 정도로 정치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면서 여야를 넘나들며 통합을 추구했다.
 
‘DJP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 정부에서는 2년 2개월 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인사청문회 제도를 통해 임명된 최초의 총리이기도 했다.

그 후 대선에도 문을 두드렸지만 그의 정치역정은 '일인지하 만인시상(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끝을 맺었다.

1934년 경기도 포천 빈농출신인 그가 처음부터 정치인은 아니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사와 검사, 변호사를 거친 율사(律士)출신이다.

3년 전 그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정치는 중업(重業)이다’ 라는 제목이다.

정치는 국사(國事)를 조직하고 이끄는 최고의 업이라는 의미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지나온 정치여정을 미화하는 여느 정치인들의 회고록’과는 결이 다른 내용들을 기술해  많은 후배 정치인들의 공감을 사기도 했다.

특히 특정 정치를 옹호하거나 편향성 노출은 배제하고 객관적 사실과 자신의 바람을 표출하면서 국민통합과 포용의 정치를 주문하고 있어 더욱 그랬다.

그는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선 보수우파에 대한 제언도 했다.

개혁을 등한시하면 보수는 망한다고 했다. 긍정적 역사관 확립과 보수의 철학을 주문하고 보수의 혁신운동을 주장했다.

아울러 처음 시작하는 문재인 정부에게 제왕적대통령제의 폐해를 스스로 고쳐나가는 국정운영만이 대통령직 성패의 열쇠라는 제언도 했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국민을 위한 통합과 포용의 정치를 주장해온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87세의 일기로 지난 8일 영면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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