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이 본 수원화성내 연무동 피난민촌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이방인이 본 수원화성 근처 연무동 피난민촌 모습. (사진=화성박물관)

한국전쟁으로 인해 집을 잃은 피난민들이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수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피난민들은 거처를 마련해야 했다. 전쟁 후에는 집들이 많이 파손돼 남의 집을 얻어 사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판잣집을 짓는 것이었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땅이 있어야 했다. 따라서 국유지에 판자집을 짓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앞 판자집 모습. (사진= 화성박물관)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 방화수류정앞 판자집 모습. (사진= 화성박물관)

그것도 성벽에 붙여서 지으면 한쪽 벽은 거저 얻게 되는 것이므로 성벽에 걸쳐 판잣집이 많았다. 1960년대 말쯤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갈 무렵 서울을 시작으로 판자촌 정비사업이 시작됐다. 서울시는 1965년부터 철거민 수용을 위한 아파트를 마포에 짓기 시작했다. 수원에서도 화성 성벽 옆 판잣집을 정리해야 했는데 대책없이 철거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 안 팔달산에서 본 화서문일원 모습. (사진= 화성박물관)
이방인이 본 옛 수원화성 안 팔달산에서 본 화서문일원 모습. (사진= 화성박물관)

돈이 적게 드는 방법을 찾은 것이 국유지에 아파트를 짓는 것이었다. 당시 국유지로서 아파트를 지을 만한 곳이 화서문 밖 서북각루 북쪽의 유휴지였다. 수원에서도 1969년에 시작해서 1972년까지 3층 건물 4개동 144세대의 서문아파트를 지었다. 입주자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골조공사는 수원시에서 건축하고 실내는 입주자가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지었다.

서문아파트 건설모습. (사진=수원박물관)
서문아파트 건설모습. (사진=수원박물관)

당시 내부공사비는 20~25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당시 80kg 쌀 한가마니에 1만원 정도였다고 하니 큰돈이 들어야 했다. 그러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입주권을 팔기도 했다고 한다. 아파트는 10평형으로 방 2개, 거실과 주방으로 구성됐고 화장실은 건물 양옆에 공동화장실을 사용하는 형식이었다. 연탄아궁이를 주방에 설치해 난방과 취사를 해결했다. 

욕실이 따로 없어서 물을 연탄 아궁이에서 데워서 부엌에서 목욕과 세면을 해결했다. 당시는 아파트생활이 익숙하지 않아 불편이 많았다. 그나마 1층의 경우에는 지혜롭게 사는 방법이 동원됐다. 거실 바닥을 파낸 후 마루판을 설치해 들어 올리는 출입문을 만들어 다용도실로 사용했다. 

심한 경우 바닥전체를 파내고 지하실을 만들어 침실로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다. 1층은 이런 방법을 활용할 수 있었으나 2,3층은 옹색하게 살 수 박에 없었다. 그나마 유일한 방법은 주방 앞의 창문을 뜯어내고 바닥을 만들어 작으나마 다용도실로 사용하는 집도 있었다. 

장독대 역시 1층집은 출입문 양편을 사용했다. 빨래를 널 곳이 없자 조경수에 줄을 매어 빨래건조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2,3층은 공간이 없어 좁은 통로를 빨래 건조대로 사용해야만 했다. 서문아파트 3개 층 중 가장 인기가 있는 층은 2층이었다. 1층은 겨울이면 화장실이 자주 막혀 악취로 고생을 많이 해야 했고, 3층은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지만 2층은 그런 고통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문아파트 사람들은 이러한 애환을 겪으면서 살아왔던 주민들이었다. 입주한지 20년이 지나자 아파트는 물이 새는 것은 물론 노후도가 심각했다. 특히 붕괴 위험건물 판정을 받은 건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협소하고 살기 불편해 주민들은 재건축을 주장하는 민원을 내기 시작했다.

서문아파트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서문아파트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수원시는 참으로 난감한 입장이었다. 철거민들에게 부담을 줄여주려고 국유지에 아파트를 지은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고 말았다. 건물은 개인소유인데 땅은 그대로 국유지로 돼있어 아파트 값이 얼마 돼지 않아 재건축을 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또 한 가지는 성곽과 2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 주민들은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했다. 수원시는 해결책으로 보상을 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기 위해 1994년 12월 주거지역이던 서문아파트 부지를 팔달공원으로 도시계획을 확정했다. 서문아파트 부지가 팔달공원에 편입된 것을 알게 된 주민들은 재건축을 요구하는 집단민원을 강하게 제기하고 나섰다. 

1995년 7월 1일 민선1기 수원시장으로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이 당선되면서 이주대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지난 1월25일자 'e수원뉴스'에 게재된 김우영 수원일보 논설위원의 칼럼에 따르면 1996년 '화성축성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수원화성 국제연극제'가 열릴 때였다고 한다.

다음은 칼럼 내용이다.

<심재덕 시장도 매일 현장에 나와 연극을 관람하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하루는 공연장에 1시간쯤 일찍 나와서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나를 부르더니 서북각루를 가리키며 저기 함께 올라가보자고 했다. 서북각루 위에서 서문아파트를 한참 바라보다가 “김 주간, 아무래도 하루빨리 철거해야겠지?”라고 물었다. 나는 “이 건물이 성벽을 가리고 있어 흉물스럽게 보인다. 하루빨리 대책을 마련해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노후된 서문아파트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노후된 서문아파트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이 때 심재덕 시장은 이미 서문아파트 철거를 결심한 듯 했다. 당시 서문아파트 주민들은 정자택지개발지구에 시영아파트를 동일 평수로 지어 무상입주를 요구하는가 하면, 무상입주가 불가능한 경우 아파트 평당 분양가격과 보상가격을 동일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섰다. 

당시 수원시에서는 정자지구에 시영아파트 건설을 추진하고 있었다. 심재덕 시장은 당시 김지완 공원녹지과장(후일 권선구청장)에게 서문아파트 이주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당시 수립한 이주계획서를 살펴보면 1999년 12월 정자지구에 건설하는 시영아파트 특별분양일이 12월 말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들에게 아파트를 분양해주기 위해서는 아파트 보상이 시급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서문아파트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서문아파트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이 때 144가구에 대한 보상비가 50억7500만원이 소요된다고 했다. 이 금액을 144가구로 나누면 가구당 3520만원 밖에 되지 않았다. 이 금액으로는 새로 짓는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주민들은 더욱 강하게 민원을 제기하고 나섰다. 2000년도에 수립한 아파트 분양계획을 살펴보면 2개 평형을 서문아파트 주민에게 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86㎡(26평형)으로 A형은 방 2개, C형은 방 3개로 돼있다. 보증금은 3300만원, 월임대료는 30만원, 5년 임대 후 분양조건이다. 또 한 가지 평형은 56㎡(17평형)으로 방 1개, 보증금은 1800만원, 월임대료는 20만원, 5년 임대 후 분양조건이다. 정자지구 시영임대아파트 특별 분양대상자는 세입자와 실거주 건물주만 분양 대상자가 됐다.

상대적으로 부담이 가능한 조건이 제시됨에 따라 주민들의 원성은 잦아들었다. 서문아파트 주민들은 자신의 형편에 맞춰 일부만 정자지구 시영임대아파트에 입주하고 나머지 주민들은 개인 사정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성벽에 기댄 판자촌을 정리한다고 지은 철거민 아파트는 또다시 장애물이 돼 철거해야 하는 악순환이 거듭된 사례가 됐다. 이로써 수원의 1호 아파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다음호에는 ‘수원시 1호 아파트는 화서공원이 되었다’가 연재됩니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