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공된 화서공원 모습(2004년). (사진=화성사업소)
완공된 화서공원 모습(2004년). (사진=화성사업소)

서문아파트 보상이 진행되자 심재덕 수원시장은 도시계획과장인 필자에게 공원조성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조성사업까지 맡아서 하라는 의미였다. 당시 공원녹지과는 서문아파트 보상만 담당했다. 도로변에 늘어선 상가와 주택의 보상도 도시계획과에서 담당해야 했다.

화서공원 착공전 모습(서문아파트 철거후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화서공원 착공전 모습(서문아파트 철거후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2001년은 기존에 수립한 화성주변정비계획을 보완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화서공원 기본계획을 화성정비계획에 포함시키려고 구상할 때였다. 하루는 기획예산과 박쾌식 예산계장이 찾아왔다. 경기도에 도비 지원 요청을 하려고 하는데 마땅한 사업이 없다는 것이다. 박 계장은 시급성을 가지면서 사업효과가 큰 사업을 찾았다. 그러면서 토지보상이 아닌 건물을 짓는 사업이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경기도지사는 임창열 지사였다. 임 지사는 1997년 기획재정부 장관시절 IMF위기를 진두지휘해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탈출시킨 분이다. 그 공로로 1998년 민선 2기 경기도지사에 당선됐다. 이 때 수원은 심재덕 시장이 무소속으로 민선2기 시장에 재선됐다. 

이 두 분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두 분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원시는 경기도청이 소재한 도시라서 소위 경기도의 수부(首府)도시다. 그런 까닭에 도 단위 행정기관이 수원에 자리잡았고 경기도와 손발 맞춰 행정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까지만 해도 도 단위로 하는 사업은 수원에 만드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런 관행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지사와 수원시장 사이가 좋지 않자 경기도청 직원들은 수원시에 사업을 주겠다는 건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임창열 지사 시절 수원시가 상대적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2001년이 되자 지역 원로들의 주선으로 두 분이 화해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화해의 선물로 2개 정도의 사업을 건의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예산계장과 여러 사업을 검토했지만 마땅한 사업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때는 화성이 세계유산이 된지 5년이 돼가는 시기여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올 때였다. 화성을 찾는 관광객으로 하여금 안내를 받고 지식을 습득하는 관광센터가 없어 아쉬웠던 시절이었다. 

화서공원내 관광센터 조감도. (사진=화성사업소)
화서공원내 관광센터 조감도. (사진=화성사업소)

그런 이유 등을 들어 경기도에 화성관광센터 건립사업 계획을 제출하게 됐다. 당시 건물을 지을 만한 장소는 서문아파트를 철거한 곳이 유일했다. 그래서 화성관광센터를 화서공원에 짓는 계획을 제출했다. 이윽고 관광센터를 건립하는 내용으로 도비50억원이 경기도로부터 보조금 결정이 났다.

2002년에는 화서공원을 조성하는 설계에 착수했다. 설계안이 구체화되자 문화재청에 문화재 현상변경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문화재 위원들은 서문아파트를 철거한 위치에 건물을 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그곳에 대규모 건물을 지으면 성곽을 가리는 것은 물론이고 팔달산의 조망을 해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서공원이 화성의 관문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실 도비 50억원을 보조받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제출한 사업계획이지만 내심 건물을 그곳에 짓는 것을 꺼림직하게 생각했던 참이었다. 때마침 문화재위원들이 제대로 걸러준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서공원에 지으려던 관광센터는 화서공원에 짓지 않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 무렵 다행이도 행궁 앞에 광장을 조성하기 위해 행정절차를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화서공원 최종 조감도.(사진=화성사업소)
화서공원 최종 조감도.(사진=화성사업소)

그래서 관광센터는 행궁광장계획에 반영하기로 하고 화서공원에는 최소한의 수목을 식재하기로 했 다. 2002년 화성열차를 도입할 시기였다. 화성열차가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서공원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래서 화서공원 공사를 정식으로 착수하기 전 화성열차 길을 먼저 닦아야 했다. 

공사중인 화서공원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공사중인 화서공원 모습. (사진=화성사업소)

당시 문화재 위원 중 정재훈 교수가 있었다. 이 분은 문화재청이 독립되기 전 문화관광부 문화재관리국장으로 있었는데 한국전통문화대학교가 설립되면서 전공인 전통조경 분야 교수가 된 분이다. 정 교수는 성곽주변에 억새 식재를 주문했다. 성곽주변에는 시계확보를 위해 나무가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그런 곳에 억새를 심었다고 한다. 억새는 전쟁 시에 불화살의 재료로 쓰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성곽주변에는 억새를 심는 것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심은 화성주변 억새는 화성과 어울리면서 화성만의 독보적인 경관으로 바뀌어 가을이 되면 억새 때문에 화성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졌다.

21-6, 화서공원 억새 군락지.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서공원 억새 군락지.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서공원이라는 푯말을 세우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화서공원 지역은 수원시 1호 공원인 팔달공원에 포함돼 있다. 계획을 세우고 공사를 시작할 때 사업명칭은 '화서문 주변 정비공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공원이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를 장안공원에서 찾았다.

당시 공원조성을 담당했던 수원시 이창우 도시과장(후일 수원시 도시국장, 경기도 도시국장, 파주시 부시장)의 증언에 의하면 공원명칭 부여를 두고 고심을 했다고 한다. 1975~1979까지 화성복원 사업을 하면서 화성의 관문을 계획해야 했는데 그곳이 바로 장안문 밖에 공원을 조성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수원에서 최초로 조성한 공원이었으므로 공원이름을 지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장안공원은 수원시 도시계획상 1호 공원인 팔달공원의 일부였다. 그런데 위치상으로 보면 팔달공원이라고 하기에는 걸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여서 우선 안내판 형식의 철제 푯말을 세워 놓고 이름이 확정되면 공원명을 쓰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공원조성사업이 마무리될 무렵 당시 백세현 시장이 현장을 방문했는데 왜 공원이름을 짓지 않고 푯말을 세웠냐고 나무랬다고 한다. 당시 수원공원, 화수(수원과 화성의 약자)공원, 영화공원(영화동) 등 많은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이름이 결정되지 않자 장안문 옆에 있는 공원이므로 우선 장안공원이라고 이름을 써놓고 이름이 확정되면 다시 쓰려고 했단다. 그런 연유로 임시로 써놓은 이름이 영원한 이름이 됐다고 한다. 

화서문 옆 서문아파트를 철거하고 공원조성이 완성될 무렵 필자는 장안공원 때와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첫째는 그곳이 팔달산 자락이었으나 성곽이 지나가고 있어 팔달산과 분리된 성격을 띠고 있는 지역이었다. 둘째는 시민들이 그곳에서 만남을 약속할 경우 어디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하다고 판단했다. 

화서공원 표석. (사진=필자 김충영)
화서공원 표석. (사진=필자 김충영)

그래서 이곳에도 이름을 지어주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화서공원’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내 시장에게 결재를 올리니 그렇게 하라는 허락이 떨어져 화서공원이라는 표석을 세우게 됐다.

화서공원은 1999년 서문아파트 보상이 시작된 지 5년 후인 2004년 12월 18일 준공됐다. 공원이 완성되자 제일먼저 경기도청에 근무하는 선후배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화성이 세계유산이 된 후 가장 잘한 것이 화서공원을 만든 것이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화서공원 준공식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서공원 준공식 모습.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이런 평가로 인해 화성사업은 관공서는 물론 주변 주민들로부터도 칭찬을 받았다. 화서공원조성으로 인해 화서공원 주변 집값이 많이 올랐다고 수원시에 고맙게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어떤 일을 하던 장래를 예측하며 살아야 서문아파트와 화서공원 같은 사례가 발생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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