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천양희, 「밥」 전문)

밥을 꼭꼭 씹는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꺼내 씹듯. 이럴 때 씹기는 돌아보기다. 삼켜지지 않는 것들을 가만가만 삭이는 마음의 수양이다. 긁힌 자국이며 멍울 따위가 문드러질 때까지.

돌아보면 씹을 일이 많은 시절이다. 코로나19 탓에 더욱 그렇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경우야 말할 나위 없지만, 긴 방역 상황에 다들 지친 것이다. 서로 지쳐 마음의 면역을 높이기도 쉽지 않다. “돌밥(돌아서면 밥, 밥)”에 파김치된 주부들 우울지수가 그 중 높았다지만.

그럴수록 잘 씹어야 한다. “외로워서” 더 먹는 밥이든, “권태로워” 많이 자는 잠이든, 힘껏 씹어야 소화가 된다. “슬퍼서” 깊어진 울음도 그저 밥이거니, 정성을 담아 씹을 일이다. 너무 지쳐 생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 마음마저 꼭꼭 씹으면 쓰디쓴 끝에도 단물이 돌 것이다. 무엇보다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라니!

때때로 씹기는 생각 고르기다. 말도 뱉기 전에 잘 씹어야 후회를 줄이듯. 어디 말뿐이랴, 글도 詩도 되씹고 되새기는 고통을 오래 거쳐야 남다른 깊이와 넓이를 얻는다. 물론 습격하듯 오는 시도 있지만, 대부분은 길게 되씹는 끝에서 독창적 표현과 문채(文彩)를 빚는다. 퇴고야말로 곱씹기 성찰의 끝판인 셈이다.

씹기가 더러 뒷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이 귀띔하듯, 밥처럼 씹어야 하는 마음의 상처들이 많다. 잘 씹어도 소화 안 되는 조언 꼰대짓도 있다. 오죽하면 독일에서는 ‘공개적 조언’이 조언보다 구타(Schlag)에 가깝다고 한다니, 새겨볼 말이다. 조언보다 심한 것은 함부로 날리는 댓글들이다. 상식과 인격의 바닥을 치는 경우도 허다하니, 부끄러움은 오직 본인의 몫이다.

백신 덕에 가까워지는 터널 끝을 바라본다. 어, 입이 있었네요, 마스크 벗고 여럿이 들썩거릴 저녁이 곧 올 것이다. 밥을 같이 씹는 것만도 거룩한 일이라고 새삼 숙여본다. 암튼 잘 씹어야 속이 순해진다. 때때로 물도 씹어 먹듯, 바람을 꼭꼭 씹으며 초록경(經)을 당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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