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아이들이 운동장 트랙을 달린다. 질서정연하다. 한 아이가 엎어지더니 일어나지 못한다. 선생님이 못 봤겠지? 한 바퀴 더 돈다. 엎어진 아이를 비켜서 달린다. 창문으로 내다보던 교장이 나가서 아이를 보건실까지 업어다 주었다.

오후에 선생님과 교장이 만났다. “잠깐 아이를 보건실에 데려다주시지 그랬어요?” “수업은 어떻게 하고요?” “애들도 이해해 주지 않겠어요?” “3학년이요? 당장 엉망이 되는데요? 스스로 일어나야지요!”…

선생님은 교장의 견해를 수용하려들지 않았다. 복음 얘기를 해보았다.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고 했잖아요?”

“그 한 마리는 죄인을 가리키는 것 같던데요? 그 애가 죄인인가요? 그 가르침은 교회의 것이고, 교장선생님은 신자도 아니잖아요!” “…” “전 제 지도방법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교장도 그 선생님의 논리를 수용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그 아이를 안아주고 보건실로 데려다주었다면 다들 떠들면서도 속으로는 ‘선생님은 내게도 저렇게 대해주시겠지?’ 생각할 것이고 그건 질서유지 못지않게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지만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가 없어서 더 생각해보자고 했다. 어설프게 꺼낸 성경 이야기를 후회했다. 그 선생님은 전체주의에 물든 것이 분명하지만 지시 명령을 수단으로 한 상급자의 강압적 방법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전체주의(획일주의)를 선호하는 선생님은 학급당 인원이 6,70명이던 시절의 교육방법을 전수받아 그대로 실천하는 경향이다. 그땐 “내 설명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대개 형편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는데 급당 25명쯤인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식이라면 심지어 농어촌이나 벽지에서 서너 명을 가르친다 해도 일쑤 “내 얘기를 잘 들어요!”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잘하는 아이는 보나마나 잘하고 못하는 아이는 여간해선 발전할 수가 없어서 늘 뒤지기 마련인데 교육이란 본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 쉽고, 첨단기기를 사용한다 해도 더욱 용의주도한 주입식 교육을 실시한다.

내년에는 국가교육과정이 또 개정될 예정이다. 교육과정이란 ‘무엇을 가르치는가?’ ‘그걸 왜 가르치는가?’ ‘어떻게 가르치는가?’ 등을 정한 교육의 기준이다. 이번에는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한 맞춤형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겠다는 희망도 제시되고 있다.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한?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그렇게 하려면 교육방법을 정말로 바꿔야 한다. 교육부는 교육과정을 바꿀 때마다 교육방법을 바꾸겠다고 했지만 우리 교육은 언제나 학생들 전체를 대상으로 한 지식 주입이 주류가 되어 왔다. 말은 일단 듣기 좋게 하지만 실현 불가능한 일일까? 그렇지도 않다.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면서 현장에서는 교육방법을 전면적으로 바꿀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에 학점이수제를 도입하고 각급학교에 디지털 기기를 잘 보급한다고 해서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한 교육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우선 선생님들이 교과서 내용을 전달하는 데 급급하게 해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 ‘학생 한 명 한 명을 위한 교육’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해서 저 아이들을 어떻게 다 가르치겠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교육은 그렇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개별로 바라보지 않고 집단으로 취급하게 된 것은 근래의 산업시대를 거치는 동안 돌연 고질병으로 굳어진 것인데 남들은 다 고쳤고 우리는 고치지 않았다.

“우리 뇌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어가면 그 의견이 옳다 하더라도 우리가 무엇을 더 알아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존 로크).” 공연한 말일까? 암기식 시험을 보고 나면 기억나는 게 없다는 말이 그 증거가 된다.

비오는 날 교문 앞에 계시던 선생님께서 비를 맞고 오는 아이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정겨운 모습을 보았다. 개별로 가르치는 건 그런 것이고 전체를 상대로 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편하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