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델타 변이 확산으로 오늘(12일)부터 경기도를 비롯 수도권은 사실상 ‘통금시대’로 접어들었다.

일정시간 이후 사회적 접촉 자체를 금지하는 ‘야간외출제한’이 본격 시행되기 때문이다.

‘밤의 자유’에 대한 인위적 제한 ‘야간통행금지’,

오래전 이 땅에 있었던 독재의 산물이었기에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통금은 역사도 오래됐다. 조선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족히 수백년은 된 듯 싶다.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기록은 이렇다. 병전 문개폐조(門開閉條)에 “궁성문(宮城門)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 때에 열며, 도성문(都城門)은 인정(人定:인경, 밤 10시에 쇠북을 스물여덟 번 치던 일)에 닫고 파루(罷漏:오경, 새벽에 쇠북을 서른세 번 치던 일)에 연다.”

다시 말해 이 시간에는 높은 관료 이하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의 통행을 금지한다는 것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이 같은 야간통행금지제도가 언제부터 시행된 것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통금은 근대화가 되면서 고종 32년, 즉 1895년 해제되지만 해방이 되자 치안유지라는 표면적인 이유로 다시 실시됐다.

그리고 37년만인 1982년 1월 5일 전두환 정권이 이를 해제, ‘밤의 자유’가 우리 생활 속에 돌아왔다.

해제 하는 날 당시 일부 국민들은 새벽 1시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렸다고 하니 야간통행금지의 폐해가 얼마나 컸는지 실감이 간다.

실제 통금이 사회 공공질서 유지 및 질서 확립목적으로 실시됐으나 근본적으로 사상 통제, 국가안보 수호, 정치적 저항세력 억압을 위해 국민들의 시·공간을 제한하는 기능을 담당해서 더욱 그랬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통금과 같은 강제된 국가적 시간규율이 한국 사람들의 ‘빨리 빨리 문화’ 즉, 속도전, 조급증, 속전속결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아무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억압의 상징 ‘통금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코로나19 델타 변이 확산 탓이지만 우리의 일상은 변화의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게 됐다.

오후 6시 이후엔 2명까지만 모일 수 있고. 직계가족 모임을 포함한 사적 모임은 물론 종교활동도 제한된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집합금지조치를 작용받는 유흥업소 다중이용시설 등도 개점휴업상태나 마찬가지가 될 전망이다.

도심의 밤 풍경이 적막해지는 것도 불보듯 뻔하다.

새 거리두기 4단계가 가져올 경제적 피해가 만만치 않음도 가늠하게 한다.

다행히 가족 간 ‘저녁이 있는 삶’의 질이 높아져 위안이 되겠지만 고통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혼돈의 길’이라고 해서 그냥 걸어만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방역을 이 정도까지 망가지게 한 당국이 원망스럽고 일상이 고통스럽지만 ‘환란’을 극복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어서다.

‘방역의무 준수’와 ‘성숙된 시민의식’을 좀 더 발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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