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유하, 「오징어」 전문)

오징어 철이면 밤바다에 불야성의 장관이 펼쳐진다. 불빛의 휘황함에 탄성을 지르다 이면을 보면 좀 씁쓸하다. 불빛에 유혹 당한 오징어들이 죽음을 향해 줄줄이 달려 나온 꼴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빛인 줄 모르고 끌려 나오는 오징어들. 밤에 먹이활동을 하는 야행성 두족류의 운명이랄까. 뭔지 먹으려다 불빛 쪽으로 오면 낚시에 걸리고 죽음의 줄에 꿰이는 것이다. 그게 오징어의 생이라도 집어등 불빛을 보면 유리창으로 달려드는 날벌레며 불나방들이 겹친다.   

그런데 “눈앞의 저 빛!”에 홀리는 게 오징어뿐이랴. 우리도 종종 '눈앞의' 무슨 '빛'인가를 좇다 아뿔싸 제 발등을 찍을 수 있는 것. 설마 '죽음'으로 가는 빛인 줄 알고도 그랬을까. 대부분은 모르고 가겠지만 알고도 가는 길도 있다. 마약이나 도박 그리고 부패니 부정 같은 것들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랑도 때로는 그렇다. 죽음까진 아니라도 끝이 보이는데 더러 벼랑까지 끌어안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듯 “찬찬한 저 빛!”을 향해 끝까지 간다면 마음의 지극에 닿으려는 것이겠다. 마음은 한없이 뜨겁다면서 실제로는 뒷걸음치는 엔간한 사랑타령으로는 어림없는 ‘죽어도 좋아’의 헌사겠다. 순간이 얼마나 황홀하면!

하지만 시인의 전언도 되짚을 일갈이다. “의심하라”는 것. 그것도 “모오든 광명을!” 그러고 보면 빛이란 어둠의 앞면이 아닌가. 대저 사물에는 빛과 그림자라는 양면성이 있다. '明/暗'처럼. 그런데 의심하지 말라는 말씀이 주를 이루는 세상에 시인은 의심하라고 칼을 들이댄다. 한둘도 아니고 “모오든 광명을” 의심하라니, 번쩍 내리치는 진검 언술에 모골이 송연하다. 

사실 의심은 확인의 한 길이다. 그것이 죽음까지 이기는 길은 아닐지라도. 하지만 광명이든, 광명 비슷한 것이든, 혹은 광명인 양 번쩍거리는 것이든, 의심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라 전해오듯 말이다. 그래야 눈부시고 찬란한 빛의 진위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수사(修辭)만 번지레한 말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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