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영 수원현미경(37)] 수원시청사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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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수원현미경(37)] 수원시청사에 얽힌 이야기
  • 김충영 도시계획학 박사
  • 승인 2021.09.2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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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영 도시계획학박사
수원군청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군청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49년 8월 13일 공포한 대통령령 제161호에 의해 1949년 8월 14일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로 승격했다. 그리고 하루만인 1949년 8월 15일 수원부(府)가 수원시(市)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법률 제32호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수원군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이 됐다. 

당시 수원군청은 북수동311번지 중영자리에 있었다. 수원군청은 수원읍이 수원시가 됨에 따라  화성군청이 사용했다. 이후 화성군청이 오산으로 옮기기 전 1970년까지 사용했다. 당시 수원읍사무소는 팔달문 옆 팔달로 2가 남신상회 일대에 있었다. 수원읍이 수원시로 승격되자 수원읍사무소를 시청사로 사용했다. 

수원읍사무소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읍사무소 모습.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1954년 10월 교동에 소재한 조선중앙무진회사라는 금융지주회사 건물(현재 수원시가족여성회관<구 수원문화원>) 자리로 옮기게 됐다. 이후 현재 가족여성회관 건물을 새로 지어 수원시청사로 사용했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수원시는 인구 30만명을 육박하는 도시가 됐다.

조선무진회사 건물과 신청사 건물.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조선무진회사 건물과 신청사 건물.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그런데 수원시는 당시 화성을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에 형성돼 있어 도시환경이 열악한 상태였다. 도심에 화성이 자리 잡고 있어 도시개발이 용이하지 않았다. 또한 1번 국도는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삼남길이 팔달문~장안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수산업도로는 서울에서 한일합섬 앞까지만 개설된 상태였다. 이즈음 백세현 시장이 1978년 8월 2일 제 14대 수원시장으로 부임했다. 백시장은 경상북도 구미시장을 하면서 구미공단과 신도시를 만들어본 경험자였다.

2001년 목표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 도면. (자료=수원시)
2001년 목표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 도면. (자료=수원시)

이 무렵 우리나라는 수도권 집중이 가속화되자 개선책을 찾기 시작한 시기였다. 도시계획은 건설부의 업무였으나 지방도시를 관할하는 내무부가 지방도시에 대한 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 수립을 주관하게 된다. 그래서 수원시는 1978년부터 시작해 1980년 수원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을 수립했다. 

필자는 군에서 제대 후 1979년 8월 9일 수원시청 도시과 도시계획계에 발령받아 수원시 도시계획과 인연을 맺게 됐고 이로인해 수원시 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을 마무리 하는데 참여했다. 수원시 도시장기종합개발계획은 법적인 계획은 아니었으나 20년을 내다보는 매우 의미가 있는 계획이었다. 최초로 동수원 개발계획이 제시된 것이다. 

백세현 시장은 이 계획에서 제시된 사항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부임하면서 구상한 동수원 개발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동수원 지역 72만평을 주거지역으로 용도지역 변경을 추진했다. 1979년 11월 18일에는 자연녹지지역에서 주거지역으로 변경되기에 이른다. 

경수산업도로 3공구 기공식 사진. 1981. (사진=수원시)
경수산업도로 3공구 기공식 사진. 1981. (사진=수원시)

권선지구는 인계동, 권선동, 세류동에 이르는 지역이다. 권선지구는 뉴타운을 건설해 수원의 부족한 상업·업무기능과 택지를 마련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숨은 뜻은 경수산업도로를 한일합섬에서 수원비행장까지 연결하자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선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1980년 5월 29일 구역이 결정돼 1981년 11월 17일 시행인가가 났다. 권선지구 개발계획에 시청부지와 양옆에는 행정관청 부지가 계획에 반영됐다. 행정절차가 완료됨에 따라 공사를 착공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그러나 당시는 10.26 사건으로 비롯된 신군부사태,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여건으로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자 체비지 매각이 안돼 공사비 마련에 차질을 빚게 됐다. 당시 수원시는 사업비 마련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을 하게 된다. 그래서 찾은 방안이  권선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한국토지공사에 위탁하는 것이었다.

한국토지공사가 수원시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였으나 조건이 있었다. 공사비 조달을 위해 확보한 체비지(땅)를 모두 토지공사에 줘야하는 조건이었다. 이로 인해 후일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수원시청 이전 계획이 수립되자 건축설계는 현상설계 당선작으로 성림건축 임장렬의 작품이 선정됐다. 건축 규모는 연면적 1만2791㎡(3869평) 지하1층, 지상4층의 설계가 완성됐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시청부지 또한 체비지여서 토지공사로부터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당시 체비지를 평당 13만원으로 책정해서 토지공사에 준 것이다. 그런데 수원시가 매입하려면 감정평가 금액으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도시과는 토지공사를 설득해 사용 동의를 받아 건축허가를 얻게 된다. 이는 미봉책이었다. 이 무렵 도시계획이 재정비됐다. 1996년 12월 3일 시청부근 동수원 중심지가 주거지역에서 업무·상업지역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원시는 고민에 빠졌다. 토지공사에 13만원에 준 시청 부지를 상업지역 감정가격으로 매입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도시과는 고심 끝에 묘안을 생각해 낸다. 당시 권선지구 단지조성공사 진척이 80%정도가 진행된 상태였다. 

권선지구 사업을 현 상태에서 정산을 하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토지공사를 설득해 정산을 하기로 합의가 됐다. 방법은 잔여 공사는 수원시가 하는 대신 잔여공사비 만큼 체비지를 평당13만원으로 가져오는 방법이었다. 20%의 잔여 공사비가 다행히 시청부지와 양옆에 관청부지 3필지를 수원시가 가져오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잔여공사를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 공무원연금공단이 경기지사를 설립하는데 땅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홈플러스 동수원점이 위치한 땅의 매입을 희망했다. 그래서 약4000여 평 토지를 평당 100만원에 매각하게 됨에 따라 잔여 공사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수원시청사 착공식에서 당시 황환지 건설국장이 공사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수원시)
수원시청사 착공식에서 당시 황환지 건설국장이 공사 개요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수원시)

이런 과정을 거쳐 수원시청 신청사 기공식이 1985년 11월 15일 현 청사 부지에서 열렸다. 이 때 남우철 도시과장이 수원시청사 건립 사업단장을 맡았다. 건축분야는 회계과 최군식 청사 담당(전 상수도사업소장), 토목감독은 김충영, 통신분야 감독은 황계수 통신계장, 전기분야 감독은 경기도 회계과 이문선 청사관리담당(전 경기도의회 수석전문위원)이 수행했다.

시청사는 1986년 말경 완공됐다. 사무실을 옮기는 작업은 연말부터 과별로 진행해 새해 1월1일 업무준비가 완료됐다. 1987년 1월 2일부터 업무를 신청사에서 시작했다. 신청사 준공행사는 1987년 1월 22일에 개최됐다. 

수원시청사 준공식 사진. (사진=수원시)
수원시청사 준공식 사진. (사진=수원시)

당시 상급기관 감사가 2년 단위로 실시됐다. 토지구획정리사업 특별회계가 일반회계로부터 시청사 땅값을 받지 않았다고 지적을 받았다. 필자는 해결 방법으로 시청사부지 2만1677㎡(6557평) 땅값을 평당13만원으로 해 8억5000만원으로 책정했다. 대신 일반회계 자투리땅을 넘겨받아 감정가격으로 8억5000만원 만큼 받는 방법으로 정산처리하고 마무리 지었다.

현재의 수원시청사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현재의 수원시청사 전경. (사진=수원시 포토뱅크)

수원시청사의 인계동 입주는 동수원 시대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현 수원시청사는 어언 건립 35년을 맞았다. 내년은 인구 130만 명의 수원특례시청사가 될 것이다. 살기 좋은 수원 발전의 산실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