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요즘 부쩍 화성 성곽과 화성행궁에 자주 간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그림 같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랗고 붉은 단풍으로 색깔을 바꾼 나무들, 옛 성, 옛 건물의 어우러짐을 보면서 감탄을 연발한다.

주말에다 날씨까지 좋아서 화성 성곽에도,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행궁동, 이른바 ‘행궁둥이(일명 행리단길)’에도, 용연에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행궁 앞은 관광객과 시민들로 가득하다. 그 인파 속 화성행궁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다. 화성행궁 대문인 신풍루 앞마당 큰 느티나무 세 그루는 잘 물든 나뭇잎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영화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화성행궁 앞 삼정승 느티나무. (사진=김우영 필자)
화성행궁 앞 삼정승 느티나무. (사진=김우영 필자)

이 세 그루 느티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됐다. 수령이 370년이나 됐다고 하는데 영의정과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을 뜻하는 품(品)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그래서 ‘정승나무’라고 불린다.

이 나무는 국내에 하나 밖에 없는 ‘삼괴(三槐)’유적이다. 삼괴란 궁궐 조정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 또는 느티나무를 심고 삼정승(삼공, 三公)이 자리했다는 데서 온 말이다.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일대를 삼괴지역이라고 부르는데 삼괴중·고등학교 이름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화성행궁 앞의 느티나무들은 백성을 돌보고 올바른 정치를 하는 삼정승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조대왕은 은퇴 후 수원 화성행궁에 내려와 살려고 했다. 만약 계획대로 수원으로 와서 노년을 보냈다면 화성행궁은 상왕궁(上王宮)이 됐을 것이다. 정승나무는 상왕궁 앞을 지키고 선 삼정승으로서 위상이 더 높아졌을 것이다.

화성행궁 앞 느티나무는 사도세자와 정조, 정약용과 연관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사도세자는 1760년 7월 온양행궁에 행차했고, 이를 기념해 느티나무 3그루를 심었다. 그 아래서 활도 쏘고 휴식도 취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후 정약용으로부터 사도세자와 느티나무 이야기를 들은 정조는 온양행궁 느티나무에 대(臺)를 쌓고 영괴대(靈槐臺)라 했다. 현재 영괴대 느티나무는 한그루만 살아남아 있다.

따라서 ‘품(品)’자 형을 유지한 느티나무 세 그루가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수원 화성행궁 앞이 유일하다.

정조는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앞에 사도세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느티나무 3주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조가 명해 심었다는 신풍루 앞 느티나무 식재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과연 이 거대한 나무들을 어디에서 어떻게 옮겨와 심었을까? 현재 나이로 370년이나 됐으면 당시에도 150년 정도 됐을 나무들인데 이런 거목을 옮겨와 심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주변의 몇몇 조경 전문가들과 정조 시대 역사 전공자들에게 질문해보니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처럼 중장비도 없고 조경기술도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150년 정도 된 거목을 파내서 끌고 와 심고 살려 내는 것은 어렵다는 반응이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면 신묘한 하늘의 안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리더라면 정조처럼’, ‘화성-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수원화성,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등 정조시대와 관련된 저서를 펴내 ‘정조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학자 김준혁(한신대 교수)과 ‘왕의 정원 수원화성’의 공동 저자인 최재군(조경기술사, 자연환경관리기술사)은 정조시대 이식설에 더 무게를 둔다.

수원문화원은 수원의 오래된 나무를 소개하는 책자를 이 달 중 출판한다. 이 책에 내가 쓴 글을 미리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 앞에 쓴 것처럼 ‘신묘한 하늘의 안배’라면 좋겠지만 화성과 화성행궁이 건설되기 전 몇 가구 밖에 없었을 한촌에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정승을 뜻하는 품(品)자형 나무를 심었을 가능성은 적다. 김준혁과 최재군은 이 느티나무의 수령이 잘못 측정된 것일 수도 있어 이식설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를테면 화성행궁 건설 당시 50년 정도 된 나무라면 충분히 이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재군은 고려시대에 개성에서 큰 나무를 캐어 수레에 싣고 강화도까지 가서 심은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수령 370년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며 나이가 훨씬 더 아래일 수도 있다는 견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렇다면 정조와 다산과 관련된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 떨어진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정확한 수령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이 느티나무들은 정조의 화산릉 행차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지켜봤고 이곳에서 정조가 백성들에게 쌀을 하사하고 죽을 쑤어 직접 맛을 본 뒤 나눠주는 장면을 아주 가까이서 목격했을 것이다. 일제가 행궁을 훼손하는 장면과 김향화 등 수원 권번의 의기(義妓)들이 이곳에서 비장하게 독립만세를 부르고 체포돼 옆에 있던 경찰서에서 고초를 당한 역사도 알고 있을 것이다.

삼정승 느티나무가 없는 화성행궁이라...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세월 앞에 무한한 생명체가 어디 있으랴. 그저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만수무강’을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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