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코로나’ 시기에 (사)화성연구회 모임이 있었다. 정말로 오랜 만에 보는 회원들은 ‘주먹 악수’를 하며 가족 보듯 반가워했다. 그럴 만도 하다. 화성연구회 회원들은 사적인 욕심으로 만난 사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기 싫어한다. 게다가 지금은 코로나19로 잠시 중단됐지만 매년 1박2일 국내 답사 2~3회, 3박4일 또는 4박5일 해외답사, 시간이 맞는 회원들의 번개답사 등 많은 시간을 함께 여행하면서 흠뻑 정이 들었다.

나이와 성별, 직업과 취미는 각각 다르지만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다. 예전엔 매달 정기 모임 후 반드시 뒤풀이 자리를 갖곤 했다. 사정상 모임엔 참석 못했어도 뒷풀이 자리엔 꼭 참석할 정도로 회원들 간의 정이 끈끈했다.

그런 사람들이 한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오죽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을까. 회의 시작 전 역시 삼삼오오 모여 안부를 나줬다.

농학박사인 조인상 선생님은 언제 만나도 참 밝고 맑고 따듯한 에너지를 주는 분이다. 농촌진흥청 정년 뒤에도 남미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농업 관련 봉사활동을 하셨고 지금도 거주지인 서둔동에서 주민자치회 문화체육분과 위원으로 봉사를 하신다. 모범적인 삶을 살고 계셔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다. 따라서 모든 회원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

‘정조의 꿈 백성을 풍요롭게-서둔벌에서 이루다’란 리플렛을 받았다. ‘초록 서둔’과 ‘서둔동 주민자치회’에서 만든 것이다. 초록 서둔은 ‘생태적으로 풍부한 환경을 가진 서둔동을 주민 스스로 보호하고 문화유산과 역사적 장소를 알기 위해 구성된 마을 공동체’란다.

조 박사님은 서둔동의 숨은 명소를 청소년들에게 설명하는 청소년마을사랑 역사탐방을 이끄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서둔동 안내 리플렛.
서둔동 안내 리플렛.

이 리플렛에는 마을의 명소인 축만제(서호)와 항미정, 탑동 향나무와 탑의 좌대, 세계적인 육종학자인 우장춘박사묘, 앙카라공원, 경기상상캠퍼스, 농업기술역사관, 여기산 주거지와 채석장, 통일벼 최초 재배지 등이 약도 안에 표시돼 있어 찾아가기 쉽다.

이 중에 특히 내 눈에 띈 곳은 통일벼 최초 재배지다.

통일벼가 최초로 재배됐던 서호 아래 농촌진흥청 시험답. (사진=김우영 필자)
통일벼가 최초로 재배됐던 서호 아래 농촌진흥청 시험답. (사진=김우영 필자)

통일벼라...이 쌀은 아직 내 기억에 생생하다. 내 ‘국민학교’ 시절 흰쌀밥은 추석이나, 설 때, 그리고 제사 때나 먹을 수 있는 특식이었다. 심지어 할아버지나 할머니 생신 때도 보리 위에 쌀을 한 홉 정도만 올려서 밥을 지었다.

보리 밥 위의 쌀밥은 당연히 생신을 맞은 분에게만 올렸다. 그러니 그 어른. 어찌 마음 편히 혼자만 드실 수 있겠는가. 눈빛 초롱하던 손주들에게 나눠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보리보다 쌀이 많이 들어간 밥이 상에 올라오더니 흰 쌀밥으로 바뀌었다. 그게 1970년대 초부터다. 통일벼가 전국에 확대 보급된 것이다.

통일벼는 다수확 품종이다. 다른 품종들보다 30% 정도 높은 생산성을 보였으며, 병해충에도 강했다.

당시 시급하게 추진한 국가 정책은 식량자급이었다. 국가 정책에 부합되는 통일벼는 1972년부터 농가에 보급됐고 재배면적은 확대됐다. 1976년 통일벼 재배 면적은 전체 면적의 44%. 수확량도 평년보다 21.8%가 증가한 521.5만 톤이나 됐다. 이듬해, 1977년에는 600.5만 톤으로 더 증가했고 쌀 자급률 113%를 기록, 이 나라는 드디어 쌀 자급자족의 시대를 맞았다.

부작용도 있었다. 일부지역에서는 통일벼 재배를 지나치게 권장했다. 다른 품종의 벼를 심으면 면 직원들이 논에 들어가 뽑아버리는 일도 벌어졌다.

통일벼는 허문회 박사에 의해 개발됐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거쳐, 미국 텍사스 A&M에서 공부한 허문회 박사. 1960년부터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허 박사는 일본 벼 유카라(YUKARA, 자포니카 품종), 대만 벼 TN1(인디카 품종)과 국제 미작연구소의 IR8의 3원 교잡으로 통일벼를 탄생시켰다. 수확량이 뛰어나 보리고개를 극복하고 70년대 우리나라 식량자급을 이루게 한 녹색혁명의 주역이다.

통일벼는 지금 재배되지 않는다. 1992년 정부의 수매가 중단됐다. 정부와 농가는 더 이상 통일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밥맛이 좋지 않은데다 냉해에 취약했단다.

‘안남미’ ‘월남쌀’이라고 불렸던 동남아시아 쌀처럼 찰기가 없는데다 밥맛도 썩 좋지 않았다. 내 어머니는 “꼭 파리가 빨아먹고 남은 밥 같다”고 못마땅해 하셨다. 그래도 ‘입안에서 굴러다니는 보리밥’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은 ‘쌀밥’이었다.

아마 압력밥솥이 나온 것이 이때쯤이었을 것이다. ‘치익 치익’ 압력밥솥으로 하면 밥맛이 한층 뛰어 났다.

서호와 서둔동 일대 산책을 그리 많이 했지만 통일벼가 여기서 처음 재배됐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조인상 박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옛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젊은 사람들이 통일벼를 알고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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