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전통 활쏘기용 화살 중 효시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다. 효시는 일명 ‘명적(鳴鏑)’ 우는 화살로 발시하면 소리가 나는 화살이다. 공격의 시작이나 방향을 알릴 때 가장 먼저 쏘는 화살이기도 하다. 숨을 참고 또 참고 제대로 된 기회를 엿보는 것. 그것이 활쏘기에 담긴 마음 중 하나다. 
필자가 전통 활쏘기용 화살 중 효시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다. 효시는 일명 ‘명적(鳴鏑)’ 우는 화살로 발시하면 소리가 나는 화살이다. 공격의 시작이나 방향을 알릴 때 가장 먼저 쏘는 화살이기도 하다. 숨을 참고 또 참고 제대로 된 기회를 엿보는 것. 그것이 활쏘기에 담긴 마음 중 하나다. 

‘깍지(角指)’라는 것이 있다. 문자 그대로 손가락에 낀 뿔이라는 도구로 우리나라의 전통 활을 쏠 때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다. 보통 암깍지와 숫깍지 두 종류가 있는데, 엄지손가락에 끼워 그곳에 활의 시위를 당기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시대에는 깍지 낀 손이 무인을 상징하는 도구이자, 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였다. 지금도 깍지를 낀 엄지손가락만 봐도 그 사람의 궁력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들 중 활에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인 국왕이 바로 정조였다. 그는 틈만 나면 어사대(御射臺)에 올라 커더란 곰의 얼굴인 웅후(熊侯)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생부(生父)인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모습을 열살 어린 아이의 눈으로 그저 지켜봐야만 했던 정조.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라는 신하들의 극악한 논리를 넘어 서기 위하여 할아버지인 영조는 호적 정리를 통하여 정조를 이미 수년전에 돌아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기에 이른다. 그리고 비록 성인이 되어 국왕에 오른 후에도 여전히 제대로 된 권력 기반을 갖추지 못해 힘겨워 했던 세월을 화살에 담아 날려 보냈다.

정조는 그 모든 것들을 활을 통해 풀어내었다. 화살을 끼우고 시위를 팽팽하게 당겨 가득 당긴 활을 ‘만작(滿酌)’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잔에 가득 술을 채우고 그것이 흔들리지 않도록 목표를 겨눠야만 자기가 원하는 곳에 화살을 적중시킬 수 가 있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흔들림 없이 참아야 한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고통을 넘고, 숨이 차올라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을 느껴야 비로소 멀리 있는 과녁이 보다 선명해진다. 정조의 활쏘기는 그런 쓰디 쓴 인내가 담겨 있다.

그렇게 지극한 마음을 화살에 담아 보내니 어찌 명궁이 안 될 수 있었겠는가. 그의 실력은 50발 화살 중 단 한발만 빗나가는 49중의 실력이었다. 지금도 ‘고풍’이라 하여, 정조가 활쏘기를 한 내용이 세세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국궁은 보통 화살 다섯 개를 한 순(巡)이라고 하여 한 순을 쏘고, 조금 기다렸다가 다시 한 순을 쏘는 방식이다. 특히 정조가 못 맞춘 화살 한개는 본인의 겸양을 알리기 위해 미덕을 발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가히 하늘이 내린 신궁의 실력이다. 필자도 20년 정도 활을 즐기는 한량 중 하나지만, 그 실력은 가히 범접하지 못할 경지로 보인다.

그러하기에 깍지는 정조에게도 ‘무(武)’에 대한 상징이자, 군권(軍權)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조실록>을 살펴보면, 정조 1년 5월 어느 날, 국왕의 새로운 통치전략과 비전을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모든 신하들에게 과감하게 매일 깍지를 끼고 생활하도록 명령하였다. 심지어 태어나 단 한 번도 활을 잡아 보지 않았던 문관들에게도 예외없이 실천하도록 하였다. 특히 선현의 일화 중 깍지를 하도 오랜 세월 끼고 생활해서 깍지가 엄지손가락과 완전히 붙어버린 이야기를 하며 그것이 진정한 신하된 자의 도리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때 문관인 정약용을 비롯하여 태어나 활 한번 제대로 당겨본 적이 없는 신하들도 꼼짝없이 활쏘기 수련을 해야만 했다.

우리가 늘 상기하고 있는 ‘자주국방’은 조선시대에도 유효한 개념이었다. 언제든지 활을 잡고 화살을 쏠 수 있는 자세, 그것이 거대한 청나라 옆에서 자주국임을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이런 강력한 군권 강화 전략을 위하여 즉위하자마자 갑옷을 입은 장수는 국왕 앞에서도 절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령을 내려 전장을 지키는 장수의 품격을 높여주는 일을 추진하였다. 갑옷을 입은 장수가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곧 전쟁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으로, 신하된 자의 도리보다 장수로써 국가를 지키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한 국왕이 바로 정조였다.

18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일궜던 국왕 정조의 첫 번째 정치 전략은 강력한 군권확보와 군사력 확충이었다. 정조는 활을 당기며 때를 기다렸다. 그것을 위해서는 가득 당긴 활을 잡고 아무런 미동도 없이 바람을 읽고 정세를 읽어야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이 아프다고 조금 당겨 놓아 버리거나,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화살을 보내면 결코 화살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지 않는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먼저 인내하고 뚝심있게 밀고 나가야 한다. 정조의 손가락에도 깍지는 항상 함께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참고 견디는 과정을 거치며, 멀리 보이던 목표는 조금씩 선명해질 것이고 종국에는 내 코 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그때야 화살은 제대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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