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상금이 많지 않으니 보상금 외에 50냥씩을 더 지급하라”

수원부 해동지도 1750년대. (자료=화성박물관)
수원부 해동지도 1750년대.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시 안녕동 일원의 융·건능 지역은 역사이래로 옛 수원의 중심지였다. 구 수원 읍치는 조선의 3대 명당으로 손꼽히던 곳이어서 조선 초기에는 선조의 능으로, 조선 중기에는 효종의 능 자리로 거론되기도 했다.
 
두 차례나 능 자리로 결정되지 못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으나 묏자리 인근에 관아와 민가가 많아 읍치를 옮겨야 한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현종(顯宗)은 ‘수원부의 혈(묘)자리는 지금은 비록 쓰지 않더라도 후대를 위해서 산야를 보존토록 하라’고 당부했다.

건능 능원침내금양전도(건능지 1821년). (자료=화성박물관) 
건능 능원침내금양전도(건능지 1821년). (자료=화성박물관) 

1789년 7년 11일(정조13년) 금성위 박명원(정조 대왕 고모부)의 상소를 계기로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 묘인 영우원(永祐園)의 이장이 결정됐다. 영우원을 이장하기 위해서는 수원부의 읍치를 옮기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새로운 읍치는 반계 유형원이 저술한 반계수록 보유편에 ‘수원의 읍치를 북평으로 옮기고 성을 쌓으면 장차 1만호 가량 되는 대도회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한 주장이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영우원의 이장과 구읍의 이전이 결정되자 이 일을 담당할 적임자로 수원부사에 훈련대장 조심태가 임명됐다. 

7월12일 수원부에 부임한 조심태는 읍내 주민들을 소집하여 영우원의 이장계획을 설명했다. 읍치이전을 위해서 보상을 실시한다고 발표를 하자 주민들은 손뼉을 치며 안도하였다고 한다. 당시 수원부사 조심태가 기록한 ‘수원부하지초록’ 7월16일자 봉표처(묘 조성지)의 보상내역을 제일먼저 정조대왕에게 보고한다. 

내용을 살펴보면 보상대상은 모두 20호라고 보고한다. 그러자 정조대왕은 집 칸수가 적어 보상금이 많지 않으니 보상금 외에 50냥씩을 더 지급하라고 분부한다. 7월 18일에 이르러 전체 보상대상에 대한 조사를 완료하고 이주할 백성 244호를 모두 객사 앞뜰에 소집시켜 정해진 금액과  추가 보상액을 나누어 주니 뜰에 모인 백성들은 기뻐 뛰며 은택(恩澤)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50냥씩 더 지급하라는 정조대왕의 지시사항은 지켜지지 않았다. 묏자리에서 가까운 1가구만 50냥이 지급된 것으로 기록됐다. 이는 임금의 지시사항이기는 했으나 244가구를 보상해야 했으므로 20가구만 특별히 50냥씩을 더 지급하기는 형평에 맞지 않아 실행되지 못했던 것이다. 

수원부하지초록 1789년 7월19일자 기사. (자료=화성사업소)
수원부하지초록 1789년 7월19일자 기사. (자료=화성사업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묏자리 조성으로 인하여 뜻하지 않게 집이 헐리는 것을 마음 아파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수원부하지초록 1789년 7월 19일자 기사를 살펴보면 보상대상 민가(民家)는 244호였다. 건물전체 면적은 1789칸 반, 원보상비 3457냥, 추가보상금 4112냥, 합계 7569냥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묘역에 포함되는 전답에 대해서도 보상비를 지급했다.

보상이 빠르게 추진된 것은 사도세자 묘인 영우원의 이장일이 10월7일로 결정됐기 때문이다. 244호에 대한 보상내역은 정조대왕의 일기인 ‘일성록’에 신분, 이름, 가옥구조, 칸수(면적), 원보상비, 추가보상비 등으로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이는 1789년 당시 수원부 읍내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9월25일 정조대왕은 수원부사에게 “신읍으로 이주할 백성 중 일반인은 스스로 집을 지어 이주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관속들은 각자 맡은 일이 있어 몸을 빼낼 방법이 없을 것이니 추위가 오기 전 조치를 취할 방법을 보고하라”고 지시한다. 

수원부사 조심태가 보고하기를 “이사할 자가 244호인데 이사를 한 자가 90호이고 미처 이사하지 못한 자가 154호나 된다고 보고한다. 관속이 몸을 빼낼 방법이 없을 뿐 아니라 근처에 농사를 짓는 자가 절반이나 되어 수확을 기다리는 자가 있는데 수확을 독려하고 관속에게는 휴가를 윤번제로 주어 추위에 탄식하는 자가 없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수원부 하지초록 1789년 9월 28일자 기사. (자료=화성사업소)
수원부 하지초록 1789년 9월 28일자 기사. (자료=화성사업소)

보상이 시작된 지 70여일이 지난 9월 28일 수원부사 조심태가 정조대왕에게 보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최종보상 대상은 319호미며, 보상 칸수(가옥면적) 2417칸, 원보상비 4818냥, 추가보상비 4394냥, 합계 9212냥으로 늘어났음을 보고한다. 이는 묘역 주변에 있는 민가를 추가로 편입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때 보상추진 상황을 살펴보면 돈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기를 고집하는 집이 16호이며, 이미 돈을 받고 이사를 하지 못하는 집이 119호가 있음을 보고한다. 이후 구읍의 이주관련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사도세자 묘 이장 일인 10월7일 이전에 마무리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도시를 옮긴 사례가 없어 보상의 사례를 찾을 수 없다. 오늘날과 비교를 한다면 원보상비는 감정평가 금액과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추가보상비는 요즈음 지급되는 영업보상, 휴업보상비, 이사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필자는 공직 생활 중 보상업무를 오랫동안 담당했었다. 공공에서 시행되는 사업은 '공공용지 취득 및 손실보상에 관한 특례법' 규정에 의해서 감정평가를 통해서 보상이 실시된다. 그러나 공공영역에서 시행되는 보상금액을 만족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233년 전 구 수원읍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지급된 보상금은 백성들 기대를 어느 정도 만족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대왕의 지극한 마음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는 16호와 보상금을 받고 이주를 하지 않는 현상은 오늘날과 비슷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구 수원읍을 이주시키는 일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행돼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나라님(정조대왕)이 추진하는 일일진데 이런 현상이 발생함은 예나 지금이나 정든 집을 떠나 새 터전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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