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에서 발행하는 ‘와글와글 수원’ 2월호를 보니 파장동 '개코막걸리'가 소개됐다. 반갑다. 내가 아는 집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안 가본 지가 20년은 됐다.

수원 파장동에는 지방행정연수원이 있었다. 지방공무원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연수를 받기위해 지방에서 상경한 공무원들이 하숙을 하면서 자연스레 형성한 ‘파장동 노송하숙마을’도 있었다. 현재는 전북으로 이전했고 하숙마을도 사라졌다.

한때 지방행정연수원의 강의를 맡았다. 이달호 수원화성연구소장과 한신대 김준혁 교수, 정해득 교수 등 역사학자들도 함께 강사진에 포진했다. 주로 화성과 용주사, 융·건릉 등 수원의 역사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강의였다. 대상자는 전국 지방정부에서 온 사무관 진급자나 교장·교감 진급자들이었다. 대개 오전 10시부터 시작해 오후 5시까지 이어지는데 끝나고 나면 목이 칼칼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폿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의 강사비는 그 자리에서 털렸다. 2차에 가면 다음 사람이 받은 봉투를 열었다.

그때 자주 가던 집이 지방행정연수원에서 가까운 개코막걸리였다.

첫 번째 방문 때 주인여자가 나를 보고 “우영 오빠!”라고 소리치며 반색을 했다. 순간 당황했다.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저리 반가워하는 것이지?’

‘외상값을 안 갚은 술집이 있었나?’ ‘혹시 취중에 실수를 하지 않았나?’ 순간적으로 생각의 회로를 빨리 돌렸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저, 수영말에서 가겟집 하던 000씨 딸 00이에요”

아, 기억난다. 그래, 0씨네 딸들. 난 그녀들의 얼굴이 가물가물했었는데 용케도 나를 알아본다.

이 가게는 두 자매가 운영한다. 주인의 손이 커서 항상 안주가 푸짐하다. 술값도 싸서 크게 부담이 안 간다. 그 이후 북수원 쪽에서 술 마실 일이 있으면 이 집을 찾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북수원 쪽으로 갈 일이 없어졌다. 내 사는 지역에서 멀기도 하고.

지금가도 내 얼굴을 알아볼까. 그녀들도 많이 변했을 것 같다.

팔달문 옆 국민은행 골목에 '국민집'이란 막걸리 집이 있었다. 난 고등학교 때부터 이 집에 드나들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나보다 10살 많은 임병호 시인, 오영일 소설가 등과 함께 다녔다. 거기서 시를 쓰는 서울대 농대생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일찍 세상을 떠난 오주석도 가끔 이 집에서 만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임병호 시인과 자주 갔던 곳은 북수동의 막걸리 도매집이었다. 이 집은 술집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가면 주인이 먹던 반찬에 막걸리를 내주었다.

유선 시조시인이 사는 신풍동에도 '감나무집'이란 허름한 대폿집이 있었다. 간판도 없고 특별한 안주도 없었다. 두부나 김치 정도였고 주인이 미꾸라지라도 잡아오면 그걸로 매운탕을 끓여 내왔다. 때로는 우리가 안주거리를 사들고 가기도 했다.

지금의 팔달구청 앞에도 대폿집이 몇 군데 있었다. 거기서 걸어 봉녕사 쪽으로 가다보면 그야말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이 나온다.

박효석 시인이 운영하던 '합창'이란 막걸리집도 있었다. 클래식음악을 틀어주던 그 집의 조개탕 맛이 기억에 남는다. 목로주점도 있었다. 정말로 30촉 백열등이 흔들거리는 집이었는데 수원을 찾아온 서울, 전주, 대구, 부산의 시인들이 이 집에서 대취했다.

지동시장에서 마을 쪽으로 접어드는 입구에 '안성집'이란 순댓국집은 40년 가까이 음식값을 올리지 않았다. 지난해 문을 닫을 때까지 4000원을 고수했다. 4000원짜리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 마셔도 7000원이면 되었다. 늘 혼자 와서 말 한마디 없이 소주를 곁들인 순댓국을 그렇게 맛있게 먹고 가던 중년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개코막걸리를 제외한 다른 집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나마 공예가 김영수가 하는 예술가 밥집이 옛 중앙극장 옆 골목에 남아 있어서 동네 벗들과 자주 만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곤 한다.

수원에도 전주처럼 막걸리골목이 생겼으면 좋겠다. 다행이 최근 수원 술이 많이 나오고 있다. 수원탁주의 '수원막걸리' 외에도 광교산 자선농원의 '휴동막걸리', 행궁동 음식점 수수한가에서 만드는 '수수한주'도 상품성이 있다. 행궁동 주민들이 준비하고 있는 '행궁둥이막걸리'도 목 넘김이 좋고 감칠맛이 있다. 행궁동에는 여러 종류의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팔딱산, 정월 같은 막걸리 전문점이 생겼다. 행궁둥이막걸리를 파는 행궁연가도 개업을 준비하고 있다.

행궁동 주민들의 수원양조협동조합 공유경제공장의 ‘행궁연가’. (사진=김우영 필자)
행궁동 주민들의 수원양조협동조합 공유경제공장의 ‘행궁연가’. (사진=김우영 필자)

다행스런 일이다. 비록 추억 속의 막걸리 집들은 사라졌어도 젊은이들의 취향까지 맞춘 새로운 수원의 술과 술집들이 등장해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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