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칼잽이(7)] 세종과 정조, 수성(守城)과 공성(攻城)의 리더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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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의 칼잽이(7)] 세종과 정조, 수성(守城)과 공성(攻城)의 리더쉽
  • 최형국 박사
  • 승인 2022.02.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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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 역사학 박사 /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 상임연출
눈이 부시게 푸른 날 조선의 22대 군주, 정조(正祖)가 잠든 건릉의 모습이다. 역사는 계속 흘러 왔고, 앞으로도 흘러 갈 것이다.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하는 것이 지도자의 기본 품성이다. (사진=필자 최형국)
눈이 부시게 푸른 날 조선의 22대 군주, 정조(正祖)가 잠든 건릉의 모습이다. 역사는 계속 흘러 왔고, 앞으로도 흘러 갈 것이다. 당대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하는 것이 지도자의 기본 품성이다. (사진=필자 최형국)

본질은 언제나 안개 저편에 있다. 그래서 명확히 보기 어렵다. <무예도보통지>의 병기총서(兵技總敍)를 보면 세종대의 군사 업적시작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종 원년(1419)에 궁궐의 방위 태세를 확립하기 위하여 취각령(吹角令)을 제정하였다.’ 쉽게 말해, 궁궐 안에서 역적모의를 비롯한 군사반란의 조짐이 포착될 경우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하여 뿔로 된 나팔(각:角)을 적용했다는 것이다. 

만약 뿔로 된 나팔이 울려 퍼지면, 바로 군사를 동원하는 병조에서 응답하는 신호를 보내고, 궁궐 당직 군사들이 모두 갑주와 무기로 완전 무장하고 궁궐의 작은 문까지 모조리 통제하는 방식이었다. 말 그대로 역적의 궁궐 침입과 동시 궐내의 모든 문을 폐쇄하여 무력화시키겠다는 소리다.

지금도 재건된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관람하러 가면 수많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수문장이 지키고 있다는 광화문같은 큰 문을 시작으로 국왕이 거쳐하던 공간까지 가려면 대략 10개에 가까운 문을 지나야 한다. 그래서 깊고 깊은 ‘구중궁궐(九重宮闕)’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즉위한 후 1년만인 1419년에 ‘취각령’같은 새로운 궁궐 방위체계가 만들어졌을까? 그냥 아무 이유없이 만들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역사사료를 보면, 그냥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면 아무런 감흥이나 배움이 없다. 도대체 왜? 그때 그런 기록이 남아 있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봐야 한다. 그래야 역사적 상상의 나래까지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세종 원년의 취각령은 세종 스스로가 내린 것이 아닐 가능성이 99%다. 이는 상왕으로 4년이나 더 권좌에 남아 있었던 태종이 진행한 일일 것이다. 태종이 누구인가? 바로 무시무시한 이방원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스스로 국왕이 되기 위하여 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도 가차없이 한 칼에 날려 버린 피도 눈물도 없는 무서운 군주다. 

그런 이를 아비로 둔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1418년부터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실은 군사와 외교를 비롯한 실질적 영역은 상왕의 것이었다. 태종의 눈에 비친 어린 세종은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순진무구였다. 그래서 태종은 지켜주고자 했을 것이다. 새로운 조선왕조를 개창했으니, 수백년 서 있는 아름드리나무처럼 오래 성장할 수 있도록 그 기초를 자신이 형제들을 직접 죽이면서까지 닦아야만 했던 것이다. 

세종이 어려워했던 일, 세종이 두려워했던 일, 세종이 더러워했던 일, 세종이 고통스러워했던 일... 그 모든 것을 아비인 태종이 직접 짊어지고 칼을 뽑아 휘두른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수성(守城)의 리더쉽이라고 말한다. 그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조선이라는 국가를 오래도록 보전해야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숙명이었다. 무조건 지켜야 했던 국왕이 세종이었다.

반면, 조선후기 군주인 정조의 아비는 누구인가? 뒤주에서 갇혀 죽은 ‘사도세자’다. TV사극이나 소설로도 너무 자주 나와서 전국민이 초등학생 정도 나이가 되면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자극적인 소재이니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것이다. 

그럼 사도세자의 아비는 누구인가? 영조다. 바로 아비인 영조의 금지옥엽이었던 아들, 조선의 미래를 책임질 푸른 청춘의 왕자가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아비의 명령으로. 왕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서 8일 동안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그 뜨겁던 여름날에 굶겨 죽임을 당했다. 역적으로. 

그것이 임오년(1762)에 일어난 참혹한 비극이라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 그 역적의 아들이 정조다. 할아버지 영조가 호적세탁을 통해 족보상으로 정조는 큰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지만, 생부는 결코 바뀔 수 없다. 그의 몸속에는 사도세자의 피가 흐르기 때문이다.

세종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절대군주적 능력자였다면, 정조의 아버지는 모든 비난의 근원이 될 죄인 그 자체였다. 그래서 정조는 수성(守城)이 아닌, 공성(攻城)의 리더쉽을 키워야만 했다. 노론으로 일컬어졌던 당대 최고의 정치파벌과의 싸움을 이겨내야만 진정한 국왕의 길을 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정치권력에 대한 처절한 공성전(攻城戰)의 입장에서 보면, 정조시대의 다양한 정치적 사건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정조시대 때부터 흐른 시간이 벌써 200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왕조국가를 넘어 식민시기를 뿌리치고, 마침내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되었지만, 공명정대한 세상은 요원해 보이기도 하다. 진정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21C형 리더쉽이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