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화성전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된 화성전도. (자료=화성박물관)

화성건설은 신읍이 건설된 지 4년 반 만인 1794년 1월 7일부터 시작됐다. 건설배경은 1762년 윤5월 21일(영조38) 사도세자의 죽음이다. 영조는 7월 23일 사도세자 장례를 마치고, 8월1일 세손(世孫)을 동궁(東宮)으로 책봉했다.

“우리 세손에게 동궁의 위호(位號, 벼슬의 등급 및 그 이름)를 정하였으니, 무릇 여러 의식과 절차는 한결같이 상례(常例)를 따르도록 하라. 지금 이후로는 주창(主鬯, 종묘사직의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의탁할 곳이 있으니, 나라의 근본이 크게 정해진 것이다.”  

2년 뒤인 1764년 2월 20일(영조40)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했다. ‘갑신처분(甲申處分)’이라고 불리는 그 지침에서 국왕은 “종통(宗統, 종가 맏아들의 계통)이 영원히 크게 확정되었으니 사설(邪說)에 흔들려 한 글자라도 더 높여서 받들면, 그것은 할아비를 잊은 것이고 사도(思悼)도 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조실록 1776.3.10.일자 기사. 정조의 일성,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1776.3.10.일자 기사. 정조의 일성,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자료=국사편찬위원회)

1776년 3월 4일(영조52년) 영조가 승하하자 정조는 3월10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즉위했다.

정조는 일성으로 "아! 과인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다.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하겠다." 했다.

이후 1786년 6월 6일(정조10) 5살에 죽은 문효세자와 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가 그해 임신 중에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왕자가 탄생하지 않자 조정에서는 대안을 찾아야 했다. 이는 사도세자의 묘인 영우원의 불신으로 이어졌다. 1789년 7월 11일(정조13) 정조의 고모부인 금성위 박명원은 영우원과 관련해서 아래와 같이 상소하였다.

정조실록 1789.7.11.일자 기사.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문.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1789.7.11.일자 기사.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문.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첫째는 띠가 말라죽는 것이고, 둘째는 청룡(靑龍)이 뚫린 것이고, 셋째는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것이고, 넷째는 뒤쪽 낭떠러지의 석축(石築)이 천작(天作)이 아닌 것입니다. 이로써 볼 때 풍기(風氣)가 순하지 못하고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지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하나만 있어도 신민(臣民)들의 지극한 애통스러움이 되는데, 더구나 뱀 등속이 국내(局內) 가까운 곳에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으며 심지어 정자각(丁字閣) 기와에까지 그 틈새마다 서려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옛 장릉(長陵)에 혈도(穴道)까지 침범했던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국내에 이미 많이 있고 보면 지극히 존엄한 곳까지 침범하지 않았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박명원의 견해였으나 선왕 영조와 약조를 고모부가 대신 나서줌으로서 정조의 의중을 대변한 것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조선의 최고 명당인 구 수원읍으로 이장하기로 결정됐다. 신읍은 반계 유형원의 주장대로 수원부의 북평인 팔달산 자락에 신도시로 조성됐다. 

1790년 6월 10일(정조14) 부사직(副司直) 강유는 아래와 같이 상소하였다.

“수원은 곧 총융청(摠戎廳)의 바깥 군영으로서 국가의 중요한 진(鎭)이고 더구나 막중한 능침을 받드는 곳이니…… 성지도 아울러 경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만약 여기에 성을 쌓아 독산성과 서로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고, 유사시에 협공의 형세를 이루게 한다면 설사 난폭하고 교활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병법에서 꺼리는 것임을 알고 감히 두 성 사이를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수원을 군사적 요충지로 만들고 사도세자의 원침을 수호하기 위한 읍성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강유의 상소가 있은 후 8일이 지난 1790년 6월 18일(정조14) 아들 순조가 태어났다. 정조는 이때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임금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상왕이 되어 화성에 와서 살겠다는 갑자년지설(甲子年之說)을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인 1791년 1월 22일(정조15)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수원부흥책을 상소하면서 “수원의 새 고을에 마땅히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도성방위체계를 확립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성 북쪽에는 북한산성이, 동남쪽에는 남한산성이, 그리고 서쪽에는 강화도가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데 서남쪽이 허해 이것을 보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정조는 축성에 대한 여론이 조성되자 신진 학자인 정약용에게 새로운 성제를 연구할 것을 지시하였다. 왕명을 받은 다산 정약용은 조선의 성제의 장점과 단점을 검토하고 중국 성제의 장점을 연구하여 1792년 겨울에 새로운 성곽안인 「성설(城說)」을 정조에게 올렸다. 

정조실록 1793.1.12.일자 기사. 화성유수부 승격관련.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1793.1.12.일자 기사. 화성유수부 승격관련. (자료=국사편찬위원회)

화성축성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은 1793년 1월 12일(정조17)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명칭을 바꾸고 부사(副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키면서 시작됐다. 유수가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하게 했다. 채제공을 화성유수(華城留守)로 임명하면서, 판관(判官) 한사람을 두어 보좌케 했다.

정조는 채제공을 초대 유수로 임명하여 화성축성에 관한 방량을 연구토록 하고 5개월이 지난 1793년5월25일(정조17) 영의정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경이 올린 축성방략(築城方略)을 보니 늙은 재상이 정신을 쓴 것이 더욱 마음에 감동되었다. 백리를 갈 때에는 90리가 반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이것은 바로 시작이 반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같이 경영하여 시작하였으니, 이루어내는 공은 오직 감독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있는 것이다.” 라고 치하했다.

이로써 화성축성 준비를 마치고 태조(太祖)가 개경(開京)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한 1394년(태조3)로부터 400년이 되는 1794년 1월 7일(정조18) 돌 뜨는 일을 시작으로 화성축성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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