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달리는 기병. 조선전기 여진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군이 익혔던 말을 달리며 창을 휘두르는 기창의 모습이다. 가장 빠르게 말을 달려 근접전투를 치렀던 최고의 무예가 기창(騎槍)이었다. (사진=필자 최형국)
밤을 달리는 기병. 조선전기 여진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군이 익혔던 말을 달리며 창을 휘두르는 기창의 모습이다. 가장 빠르게 말을 달려 근접전투를 치렀던 최고의 무예가 기창(騎槍)이었다. (사진=필자 최형국)

한글이 담긴 『훈민정음(訓民正音)(해례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 본 책 이름이다. 세종이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이 문자의 생성원리인 음가 및 운용법,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설과 용례를 붙인 책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두가 그 책에 담긴 ‘한글’이 있기에 서로 글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시절 편찬된 『훈민정음』 만큼이나 중요한 병법서가 있다. 정조시대 편찬된 『무예도보통지』에도 세종대 군사업적 중 가장 뜻깊은 책이 『계축진설(癸丑陣說)』의 편찬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이 병서는 기존의 병서편찬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바로 현장 지휘관이 직접 병서를 편찬했다는 것이다. 기존에는 군사이론에 밝은 문관들이 병법서 편찬시 핵심지휘를 담당하였다. 그래서 전투를 거치며 얻게 된 소중한 현장의 경험들이 그저 몇 줄 안되는 분량으로 축약되거나 혹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병법서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계축진설(癸丑陣說)』에는 철저한 실전의 의지를 담아내었다. 그 현장 지휘관이 하경복(河敬復)이다. 그는 조선이 개국한 직후인 1402년 태종 2년에 무과에 급제해 무관으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조선초기 계속되는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함길도를 비롯한 국경지역에서 주로 근무하며 현장의 실무를 익혀나갔다. 특히 세종대 핵심적인 군사업적인 4군 6진을 개척한 후 이 지역의 방비업무를 담당했을 정도로 세종의 관심을 받았다.

이후 북방의 주력 방어진인 경성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근무하면서는 여진족과의 전투를 한해에만 수십번씩 치를 정도로 실전전투능력을 검증받은 맹장이었다. 이 병서는 태종대에 만들어진 여진족 기병방어전술을 담은 『진도법(陣圖法)』을 바탕으로 실제 전투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경복이 세세한 전술을 보강한 것이다.

『계축진설(癸丑陣說)』은 초기형 진법서라서 행진(行陣)·결진(結陣)·군령(軍令)·응적(應適) 등 네가지로 아주 단순하게 실무형으로 만들어졌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기동력이 우수한 여진족 기병을 상대하기 위하여 조선군도 50명을 기본 편제로 하여 빠른 대응전술이 돋보인다. 부대의 숫자가 아무리 많더라도 빠르게 대응하려면 최소한의 신속대응전력을 구축하는 것이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큰 방책이다. 그래서 지금도 전방부대에서 ‘5분대기조’를 비롯한 신속대응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진족이 기습과 매복 작전이 뛰어나기에 야간에도 ‘청자(聽子-청음초)’라고 불렸던 척후부대를 따로 편성하여 방어능력을 높였다. 소리 소문도 없이 얼어붙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말을 타고 내려와 순식간에 국경마을을 약탈해가는 여진족의 말발굽 소리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방어조치였다. 여기에 아직 여진족에게는 보급되지 않았던 다양한 중소형 화약무기를 휴대용으로 제조하여 화력까지 높였다.

또한 두만강 주변으로는 습지와 산세가 험한 곳이 많아 좁은 산길이 많았다. 그래서 부대의 이동시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는데, 이 병서에서는 소규모 단위로 전투인원을 나누고 마치 생선두름(漁貫:어관)처럼 부대원을 이동시키는 행군전술을 정립시켰다.

행군 중 갑자기 적의 매복군이나 정예군에 노출되면 아군의 피해가 심각해진다. 안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들이 잘 휴식을 취한 후에 전투를 개시하는 것이 동서양 군대의 기본 전술이었다. 그래서 행군 중 신속한 방어전술을 구축하기 위하여 『계축진설』에서는 최전면에 방패수 1명과 창검수 1명, 그리고 화약무기를 다루는 화통수와 활을 다루는 궁수 1명 등 보병 30명을 차례로 배치하여 적의 기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여기에 보병 뒤로는 근접공격을 담당하는 기병인 기창대(騎槍隊) 10명과 원거리 공격부대인 기사대(騎射隊) 10명을 각각 배치하여 적의 추격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렇게 방패수와 창검수 그리고 궁수 및 화통수 등 10명 정도의 적은 인원이 소규모 방진이나 원진을 치고 적의 예봉을 막아내면 후미의 기병이 신속하게 다음 전술을 펼칠 수 있기에 여진족을 압박하기에 가장 좋은 전술로 평가 받았다. 또한 군율을 엄격하게 확립할 것을 주문하며 군사명령과 신호를 따르지 않는 자. 군사 기밀을 누설하는 자, 탈영하는 자, 전투시 서로를 구원하지 않는 자, 술과 노름판으로 군기를 문란하게 하는 자 등을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이 북방의 명장 하경복에게 명해 편찬한 『계축진설』에는 수많은 실전 속에서 조선군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경험들이 담긴 진실한 국방 자산이다. 아쉽지만, 이 병서를 따로 묶어 책의 형태로 된 간행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그 전체 내용을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옮겨 놓았기에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장밋빛 정책과 이론도 현장의 경험이 녹아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그래서 군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공간에서도 현장 지휘관의 경험 가치가 중요한 것이다. ‘필드가 선생이다’라는 명언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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