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복원당시 장안문 현판사진. (사진=소형 양근웅선생 장녀 양원경 소장)
1979년 복원당시 장안문 현판사진. (사진=소형 양근웅선생 장녀 양원경 소장)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4대문 중 북쪽에 위치한 문으로 화성의 정문이다. 장안문은 1794년 2월 28일 공사를 시작해서 9월 5일 완공됐다. 장안문이란 이름은 정조가 정했고 현판 글은 조윤형이 편액을 썼다. 장안은 중국 주나라 이래로 진·전한·수·당 등의 수도였다.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였다. 

정조는 장안의 영화를 화성에서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화성 북문의 이름을 장안문이라고 지었다.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파괴됐으나 1975~1979년 복원됐다. 화성복원사업은 ‘김충영의 수원현미경(47)-이병희의 수원화성복원 이야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병희 무임소장관의 발의로 김종필 국무총리의 결재와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로 시행된 사업이다.

‘수원사랑’ 통권59호 1993년 1월호 기사내용 사진. (자료=수원문화원)
‘수원사랑’ 통권59호 1993년 1월호 기사내용 사진. (자료=수원문화원)

장안문 현판은 소형(素馨) 양근웅(梁謹雄)선생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록은 수원문화원이 발행하는 ‘수원사랑’ 통권59호 1993년 1월호 수원사랑 응접실코너 ‘수원시민과장 양근웅씨’ 편에 장안문을 쓰게 된 이야기가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20여 년 전 수원성을 복원하면서 현판을 쓸 사람을 찾던 중 그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1999년 6월 수원시와 수원문화원이 출간한 수원지명총람 202쪽 장안문 편에 ‘장안문 현판은 전 수원시청 시민과장 양근웅의 글씨이다’ 라고 표기돼 있다. 그런데 ‘김종필 증언록, 광복 70주년 특별회고 (2015,8,14)’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에는 장안문이 있는데 화성을 복원할 당시 이병희 의원이 권유해 ‘장안문(長安門)’ 현판을 내가 써서 걸었다”라고 한 회고문이 논란을 일으켰다.

이창식, 한동민 저술 ‘수원야사’ 책표지. (자료= 한동민 화성박물관장)
이창식, 한동민 저술 ‘수원야사’ 책표지. (자료= 한동민 화성박물관장)

논란에 따른 이의 제기는 이창식 · 한동민이 저술한 ‘수원야사’(2017.4.30) “장안문 현판 글씨는 누가 썼는가, 부제 김종필 국무총리가 쓰기로 했던 약속, 폭설 탓에 무산”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이 쓴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글의 요점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화성복원 당시 경기도청 건축기사로 화성복원의 실무 책임자였던 이낙천(전 화성연구회 이사장)에 의하면 경기도는 장안문 현판글씨를 이병희 국회의원을 통해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글씨를 받는 것은 조병규 도지사가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결재를 받는 날 글을 받기로 했단다. 지·필·묵 준비를 이낙천이 담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낙천은 서울로 가기 전날 강화도로 출장을 가게 됐다. 그런데 그 전날 밤 내린 폭설로 인해 수원에 돌아오지 못했다. 지·필·묵을 도지사에게 전달하지 못해 국무총리에게 글 부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낙천은 1975년 말 경징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장안문 현판 글씨를 김종필 국무총리 대신 조병규 도지사가 쓰기로 했다고 한다. ‘조병규 도지사는 경남 사천 출신으로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하고 붓글씨를 배운 경험으로 장안문 현판 글씨를 쓰게 되었으니, 공식적으로 장안문 현판글씨는 도지사 조병규의 글씨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글씨가 작고 필획에 문제가 있어 당시 경기도청에 근무하던 필경사였던 양근웅이 개작을 하게 됐다.

… 당시 경기도 문화공보실 학예연구사였던 이신흥의 전언에 따르면 장안문 글씨는 도지사 조병규가 쓴 것을 양근웅이 도청문화공보실에서 개칠(改漆)하였다고 한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이낙천과 신응수 대목장은 장안문 현판 글씨는 김종필의 글씨가 아니었다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김종필은 왜 본인이 쓴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을까? 

두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국무총리실 일정표 등의 자료에 기초해 장안문 현판 글씨를 쓰게 돼 있던 것을 쓴 것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장안문 현판 글씨를 썼으나 실제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이다. … 그럼에도 장안문 현판 글씨에는 기명과 낙관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라고 적고 있다. 

지금부터는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와 양근웅 선생과의 관계는 '김충영의 수원현미경(28회)' 2021년 7월 19일자 ‘서장대 현판은 정조대왕 친필이다’ 에서 밝힌 바 있다. 1988년 7월 1일 수원에 구청제도가 도입되자 필자는 도시과 도시계획계 차석을 하다가 도시과 구획정리계장으로 승진했다. 

수원시서우회 족자 소형 양근웅 선생 글씨. (자료=김충영 필자)
수원시서우회 족자 소형 양근웅 선생 글씨. (자료=김충영 필자)

당시 도시과는 시청 현관 왼쪽에 있었고 맞은편에는 시민과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양근웅 시민과장을 자주 뵙게 됐다. 선생께 서예를 배우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자 서예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있으면 그룹을 만들어 보라고 해서 1989년 '수원시청 서우회'를 만들게 됐다. 

당시 모임은 회장도 없이 필자가 총무 역할을 하면서 주도했다. 그런 인연으로 소형 양근웅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선생과의 인연은 2001년 지병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12년간 이어졌다. 선생과의 관계는 집안 어른 모시는 정도로 가까웠다. 

화성장대 편액. 1994년 소형 양근웅 선생이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화성장대 편액. 1994년 소형 양근웅 선생이 썼다. (사진=김충영 필자)

선생께서 대작(大作)을 하실 때면 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도와드리곤 했다. 1989년 올림픽공원 기념비 휘호, 1994년 북지상련비 휘호, 1994년 화성장대 편액 글씨, 1991년 11월 화성기적비문 제호 글씨 등을 함께 작업했다. 이 무렵 선생은 정년이 몇 년 안남은 시절이어서 퇴임 후 구상을 말씀하곤 했다.

제12회 수원시 문화상(예술분야) 수상후보자 공적조서 표지. (자료=김충영 필자)
제12회 수원시 문화상(예술분야) 수상후보자 공적조서 표지. (자료=김충영 필자)

당시 필자는 그동안 수원시 서예계 발전을 위해서 봉사하신 것이 많으니 수원시 문화상에 도전해보라고 말씀을 드렸다. 몇 가지 소개하면, 1974년 경기도서가회를 창립해서 초대, 2대, 3대회장을 역임했고, 같은 해부터 시작한 경기도여성회관 서예 강의를 14년동안 했다.

그리고 내무부연수원 시장 군수반 서예 강의를 10여년 했다. 그리고 선생님은 경기도 관내 공적인 기념물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필자는 선생님과 이들 작품을 돌아보면서 사진작업을 했다. 그렇게 해서 제12회 수원시 문화상(예술분야) 수상후보자 공적조서를 만들게 됐다. 

그러면서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나하나 듣게 됐다. 선생님은 부모님이 일본에서 생활하셔서 일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 부친께 서예를 배워서 붓을 가까이했다. 소학교 3학년 때 전 일본 서예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았다고 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해서 진주에서 살았다.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5년 정도하고 퇴직해 농협중앙회와 법무부 등에서 근무했다. 

퇴직하고 사업을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후 수원에 와서 살았는데 마침 고향선배인 조병규씨가 경기도지사(1973.1~1976.10)로 부임했다. 그의 능력을 아까워한 조병규 도지사의 천거로 경기도청 필경사로 일하게 된다. 수원성복원정화사업이 시작되자 소실된 장안문과 창룡문 복원공사도 함께 추진됐다. 

이때 장안문 현판의 글씨를 위의 기사 내용과 같이 수원성복원사업을 추진했던 이병희 국회의원은 육사동기이자 ‘5.16동지’인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기회를 주고자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런데 한동민의 글과 같이 폭설 탓에 이낙천이 지·필·묵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자 김종필 국무총리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대안으로 조병규 경기도지사가 써야 되지 않겠냐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장안문 현판은 높이 170cm, 폭 403cm나 되는 대형 현판의 글씨를 전문 서예가가 아닌 사람이 쓰기에는 무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조병규 경기도지사는 당시 필경사로 근무 중인 서예가인 소형 양근웅 선생에게 현판 글씨를 쓰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당시 양근웅 선생은 필자에게 이렇게 술회했다.

“평소 대작을 쓸 때면 집사람이 먹을 갈아 주었는데 장안문 현판을 쓸 때에도 집사람이 먹을 갈아주었다. 글씨를 쓰기 전에도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어떻게 장안문(長安門)의 이미지에 맞는 글씨를 쓸 것이냐가 문제였다. 

소형 양근운 선생이 당시 사용한 붓과 벼루 사진. (자료=소형 양근웅선생 장녀 양원경 소장)
소형 양근운 선생이 당시 사용한 붓과 벼루 사진. (자료=소형 양근웅선생 장녀 양원경 소장)

우선 정조대왕의 효심과 음양오행을 고려해 서체를 결정했다. 음양을 따졌을 때 팔달문(八達門)이 양이라면 장안문은 음에 해당됐다. 양이 남성적이라면 음은 여성적이다. 시대적 배경과 음양을 고려, 여성적 이미지의 서체, 그리고 대중적인 서체를 찾다보니 구양순체가 된 것이다.”

이 내용은 ‘수원사랑 응접실-수원시 시민과장 양근웅씨’ 편에도 나와 있다. 

그리고 글을 쓸 때 어려움도 들려주었다. 글이 크다보니 큰 붓으로 써야했는데 먹물을 많이 묻히다보니 자주 찢어졌다고 한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종이를 여러 겹 배접해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때 썼던 붓과 벼루를 소형 양근웅 선생의 장녀 양원경이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양근웅 선생님은 필자에게 동문인 창룡문 현판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 바 있다. 당시  이규이(李圭貳) 경기도 부지사가 쓰겠다고 하여 양근웅 선생은 이규이 부지사를 몇 달 동안 지도하여 현판을 완성했다고 했다. 

이규이 경기도부지사가 쓴 창룡문 현판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이규이 경기도부지사가 쓴 창룡문 현판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소형 양근웅 선생의 유족은 아버지의 유품을 수원시에 기증할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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