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칼잽이(9)] 유(瑈), 유(由), You,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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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의 칼잽이(9)] 유(瑈), 유(由), You,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최형국 박사
  • 승인 2022.03.23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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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 역사학 박사 /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 시범단 상임연출
몸 수련 중 택견의 곁차기를 시범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다. 쉼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몸으로, 마음으로 새겨질 때 비로소 조금씩 이해하고 알아 가는 것이다. 앎이란 그러한 반복의 연속이다. 한번 깨우쳤다고 수련과 공부를 멈추면, 그것이 바로 ‘도로아미타불’인 것이다. (사진=필자 최형국)
몸 수련 중 택견의 곁차기를 시범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이다. 쉼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몸으로, 마음으로 새겨질 때 비로소 조금씩 이해하고 알아 가는 것이다. 앎이란 그러한 반복의 연속이다. 한번 깨우쳤다고 수련과 공부를 멈추면, 그것이 바로 ‘도로아미타불’인 것이다. (사진=필자 최형국)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우리에게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라는 더 잘 알려진 세조(世祖)의 이름이 ‘이유(李瑈)’다. TV 사극이나 소설 속에서 세조는 냉혈인으로 묘사되곤 한다. 문종(文宗)이 병약하여 일찍 죽고, 나이 어린 친조카 단종의 목숨을 끊어 놓은 무서운 왕. 

그래서 세조는 또 다른 왕위찬탈을 방어하기 위해 군사관련 업무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또 다른 쿠데타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중 선대 국왕들의 군사적 업적을 순서대로 기술한 <병기총서(兵技總敍)> 부분에 세조관련 내용이 유독 많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세조가 친히 편찬한 『병경(兵鏡)』이다. 이 병서는 세조가 장수의 입장에서 군사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것이다. 일종의 훈화 교육서의 일종이다. 훗날 신하들이 『병장설(兵將說)』이라는 이름으로 바꾼 책이다. 세조는 그 이름에 ‘경(鏡)’ 즉, ‘거울’을 넣고 싶어했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늘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을 전달하고 싶어서였다. 

세조는 용맹한 왕자였다. 다른 왕자들과는 다르게 늘 사냥과 무예훈련을 즐겨 익혀 세종대부터 관심의 대상이었다. 성격도 장수처럼 단단했다. 세조는 군사훈련과 관련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병경』에 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군주가 된 그 또한 자신의 앎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더 단단하게, 더 치밀하게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을 뿐이다.

유(由),
공자의 제자 중에도 ‘유(由)’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중유(仲由)’, 우리가 너무나 자주 접하는 중국의 고전 중 『논어(論語)』에도 종종 등장한다. 『논어』의 글쓰기 구조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설파한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방식이다. 그래서 주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길(子曰)’이라고 시작하여 제자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는 구절이 많다. 

‘유(由)’는 ‘자로(子路)’ 또는 ‘계로(季路)’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공자보다 아홉 살 아래로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성격이 거칠고, 용맹스러우며 황소고집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마도 공자의 제자들 중 가장 나이 많이 먹은 늦깎이 제자일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다.

유는 젊었을 때 머리에는 웅계(雄鷄: 전투를 생업으로 삼는 용병을 상징하는 수탉 깃으로 장식한 관)를 쓰고, 허리에는 가돈(猳豚: 용맹을 상징하는 수퇘지 가죽으로 된 튼튼한 허리띠)을 두르고 공자를 능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가 예의를 갖춰 가르치자 마침내 그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요즘으로 치면 건달 아저씨가 늦게 철들어 공부한 셈이다. 그래도 뒤늦게 철이 들었지만, 공자의 제가가 되었기에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얼마나 값진 삶이었겠는가! 

서설이 길었지만 아무튼, 공자가 제자 ‘유(由)’에게 남긴 『논어(論語)』의 구절은 지금도 명문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由(유) 誨女知之乎(회여지지호) 知之爲知之(지지위지지) 不知爲不知(부지위부지) 是知也(시지야)’다. 살면서 한번쯤 들어 봤을 법한 구절이다. 안 들어 봤으면, 지금 보면 된다. 배움에 무슨 때가 있겠는가. 필자도 말 타고 칼질만 하다가 조금은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내용은 의외로 단순 명쾌하다. ‘유야, 내가 너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겠다(由 誨女知之乎).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知之爲知之),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不知爲不知), 이것이 아는 것(是知也)이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대해 스스로 정직하게 받아드리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You,
이 글을 읽고 있는 모든 이들이 ‘You’다. ‘지지배배’ 거리는 새소리를 듣고, 우스갯소리처럼 ‘지지위지지, 부지위지지’를 새들도 아는구나 하는 이야기도 있다. 자신의 삶 속에서 ‘아는 것(知之:지지)’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다. 사는데로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 반대로 생각하는데로 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의 삶 속에서 아는 것을 행하고, 또 다시 고민하고 풀어가는 것이 진정한 ‘아는 것’이다.

필자도 부족한 실력인지라, 공부를 하면서 모르면 당혹스럽기도 하고 민망한 때가 많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가 되면 잘못된 ‘자신감’이 만용처럼 나타난다. 반대로 누군가와의 비교를 통해 끝없는 콤플렉스에 휩싸이기도 한다. 흠모가 아니라, 열등감에 젖어 매사가 불만투성이가 된다. 그렇게 나이가 들면 ‘나 때는 말야’를 외치는 ‘꼰대’ 소리를 듣게 된다.

평소 자신의 몸으로 체득한 지식이 아니라 남에게 살짝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자기의 앎인 양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도 그리 깊은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경계하고 또 경계한다. ‘지행합일(知行合一)’, 결코 쉽지 않은 삶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