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과천길과 시흥길이 표기돼 있다. (자료=국립중앙도서관)
대동여지도, 과천길과 시흥길이 표기돼 있다. (자료=국립중앙도서관)

정조는 1789년 10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매년 1~2월에는 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때 원행길은 지금의 남태령을 넘어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가는 길이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창덕궁을 나서서 노량의 배다리(주교)를 건너 용양봉저정–만안고개–금불암–금불고개(지금의 숭실대학 부근)-사당리–남태령–과천행궁–찬우물점–인덕원교–갈산점–원동점–사근평행궁–지지대고개–화성행궁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 길은 조선의 6대로중 제5대로인 제주대로의 구간이었다. 이때 숙소 혹은 주정소(晝停所,  낮에 머무는 곳)는 과천행궁인 온은사 였다. ‘원행정례(園幸定例)’에 의하면 서울에서 현륭원에 이르는 길은 85리요, 교량은 21개라고 적고 있다. 

수원행차의 기회가 잦아지자 정조는 남태령을 관리하는 과천백성들의 고생을 측은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정조는 과천길 유지에 따른 폐단을 없앨 방도를 비변사로 하여금 마련하게 지시했다. 비변사는 1790년 10월 24일(정조14) ‘비변사등록’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과천 신작로의 길 닦는 일은 역(役)은 크고 공(工)은 번거로웠는데 하물며 겨울철이니 그 어깨를 쉬고 폐단을 없앨 방도를 자세히 묻고 두루 자문하여 논리 하여 초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외읍(外邑)의 민정(民情)은 멀리 헤아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관문(關文)을 보내 도백에게 물어 민원과 읍정(邑情)을 찾아 살펴 논리 하여 첩보(牒報)하게 하였습니다. 경기감사 김희가 보고한 바를 보니 과천현감 홍대영의 첩보를 낱낱이 들고 ‘본 현의 신작로는 거의 20리에 가까운데 일하는 곳이 산을 깎고 돌을 치우거나 돌을 쌓아 흙을 보태지 않는 곳이 없으나 지금은 남은 것이 단지 교량과 은구(隱溝:땅속의 수채)뿐이고, 그 밖의 일하는 곳은 3~4일 안에 거의 일을 마칠 수 있으니 민정이 모두 마침내 오로지 담당하기를 원하지만 남태령에 만든 길은 비록 이미 일이 완성되었으나 본래 석산(石山)으로 한번 장마 비가 지나면 필시 모양이 없어져버려 해마다 수치(修治)해야 할 테니 영원히 과천 백성으로 하여금 오로지 담당하게 하면 참으로 치우쳐 노고하는 탄식이 있을 것이므로, 내년부터 이후로 남태령에 길을 만들 때에는 예대로 이웃 읍에 나눠 정해주고 힘을 합쳐서 수치 하는 일을 영원히 정식으로 삼는다면 폐단을 없애는 방도라 할 수 있겠으며,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한 곳과 교량·은구를 아울러 모군례 (募軍例)로 값을 주어 사역하면 또한 어깨를 쉬게 하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품삯을 주어 남태령을 관리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후에도 원행은 남태령이 있는 과천길로 이어졌다. 을묘년 혜경궁홍씨 회갑연이 화성에서 열리기 전까지 정조는 여섯 차례에 걸쳐 과천길로 행행을 했다. 

정조실록 1794년 4월 2일자 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1794년 4월 2일자 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화성건설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자 경기감사 서용보가 정조에게 시흥길 건설과 시흥행궁 건설계획을 보고한다. 1794년 4월 2일(정조18)자 ‘정조실록’은 ‘금천행궁을 짓다’ 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현륭원에 거둥할 때의 연도에 있는 지방 가운데 과천지역은 고갯길이 험준하고 다리도 많기 때문에 매번 거둥할 때를 당하면 황송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또 길을 닦을 때에 백성들의 노력이 곱절이나 들어가므로 상께서 이런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여러 차례 편리한 방도를 생각해보라는 명이 있었기에 전후의 도신(道臣,경기감사)들이 모두 금천으로 오는 길이 편하다는 내용을 이미 진달했습니다. 신이 이번에 살펴본 바로는 비단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현저한 차이가 없을 뿐 아니라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또한 평평하고 넓으니 이 길로 정하는 것은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년 거둥 때에 거행할 여러 절차에 대한 문제는 이미 전교를 받았으므로 관아의 수리와 길을 닦는 등의 일은 지금 당장 착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서(關西)의 남당성(南塘城)을 쌓고 남은 돈이 아직 1만 3천여 냥이 남았다고 하니 우선 가져다가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동안 정조가 원행할 때 당일 수원에 올 수 없었기에 과천행궁에서 유숙을 했다. 시흥길을 만들 경우 창덕궁과 화성행궁과 중간지점이 시흥이었기에 시흥로 건설과 시흥행궁 건설을 동시에 추진돼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만안교와 설명판 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만안교와 설명판 사진. (사진=김충영 필자) 

1795년 윤2월 열리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때 연로한 어머니의 무리한 행차를 염려한 배려도 시흥로 건설 배경이다. 이 또한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이야기를 안양 만안교 설명판에 적고 있다. 

‘원래 서울에서 수원가는 길은 노량진과 동작을 거쳐 과천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다리가 많고 고갯길이 있어서 행차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과천에는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한 김상로(金尙魯)의 형 김약로(金若魯)의 묘를 지나게 되므로 정조가 이를 불쾌히 여겨 시흥 ~ 수원 쪽으로 길을 바꾸면서 안양천을 지나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시흥현지도 1871년 제작, 만안교와 시흥행궁이 표기된 지도. (자료=서울대 규장각)
시흥현지도 1871년 제작, 만안교와 시흥행궁이 표기된 지도. (자료=서울대 규장각)

시흥로 건설은 1794년 4월 2일 정조의 허락으로 경기감사 서용보가 책임을 맡아 추진했다. 평안도의 남당성 축성공사에 쓰고 남은 돈 1만 3천냥을 투자하여 완성했다. 이 길에도 안양천을 비롯하여 많은 개울이 있어서 크고 작은 교량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많은 교량이 건설됐는데 ‘원행정례’에 의하면 서울에서 현륭원까지의 거리는 83리(당시는 10리가 지금의 5.4km에 해당) 이고 24개의 다리가 건설됐다고 기록돼 있다. 지금의 안양시 석수동에 있는 아름다운 돌다리 만안교는 1795년 9월에 경기감사 서유방에 의해서 완성됐다. 

또한 1796년에는 안양에 만안제가 건설됐다. 이는 비단 농업용수의 공급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0리에 걸친 도로 건설도 이유 중 하나였다. 시흥로는 1700여 명의 인원이 말을 타고 5행(行) 혹은 많은 경우에는 11행으로 열을 지어 행진하는 까닭에 연로의 폭이 넓어야 했다. 

연로의 폭은 대략 24척이었는데 대략 10m 정도이다. 그래서 이 도로는 순조 때에도 계속적으로 확장돼 정조 때보다 더욱 넓어지게 됐다. 마침내 이 길은 조선후기 7대로인 ‘수원별로’로 부르기도 했다. 이 길은 과천을 지나가던 제주대로의 노선이 변경된 것이다. 

정조는 재임기간 13회에 걸쳐 현륭원을 참배하게 되는데 7회는 과천길을 이용했고, 6회는 시흥길을 이용해 현륭원을 참배했다. 이렇게 건설된 시흥로엔 1905년 경부철도가 놓이게 됐다.
 
또한 시흥로를 포함한 제주대로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1번 국도가 됐다. 원행길인 시흥로는 1968년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중심 도로기능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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