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국의 칼잽이(13)] 영조, 용두봉미(龍頭鳳尾)를 바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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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의 칼잽이(13)] 영조, 용두봉미(龍頭鳳尾)를 바치게 하다
  • 최형국 박사
  • 승인 2022.05.18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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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국 역사학 박사 / 수원시립공연단 무예24기 시범단 상임연출
임백현의 면신첩 중 용두봉미(龍頭鳳尾)라는 글자가 선명하다.(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무관으로 등용된 임백현(林百鉉)의 면신첩(免新帖)에 용두봉미(龍頭鳳尾)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용두봉미(龍頭鳳尾).

문자 그대로 보면 ‘용의 머리(龍頭)와 봉황의 꼬리(鳳尾)’를 말한다. 얼핏 보면 엄청나게 귀한 보물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국왕인 영조(英祖)가 신하들에게 이것을 바치라고 하명을 내렸을 정도니 일반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값비싼 것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러나 ‘용두’는 돼지고기를, ‘봉미’는 닭고기를 의미한다. 실로 재미있는 발상이다. 조선시대에는 고기가 귀했다. 요즘처럼 대량으로 사육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에서 몇 마리를 키우거나 대량으로 키운다고 해도 그 숫자는 한정되어 있었다.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백성들은 메뚜기를 볶아서 간식처럼 먹거나, 천렵(川獵)을 통해 물고기를 잡아서 허기를 달랬다. 소고기는 꿈도 못 꾸고, 돼지고기나 닭고기는 명절이나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귀한 음식이었다. 심지어 소는 농삿일에 사용하는 귀한 동물인지라, 소 도축은 조선시대에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할 정도로 귀하게 대접받았다.

한 때 근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자주 들었던 ‘이밥에 고깃국-(흰 쌀밥에 쇠고기 국)’이라는 말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준 것이었다. 일단은 배부르게 먹어야 살맛이 나는 것이다. 그러니 고사 상에 올라 온 돼지머리가 용(龍)의 머리처럼 불렸음직하고, 통통하게 살 오른 닭이 봉(鳳)의 꼬리라고 비유해도 어색하지 않을 듯싶다. 

『무예도보통지』의 「병기총서(兵技總敍)」 중 영조와 관련한 내용에 이런 부분이 등장한다. 

“영조 45년(1769) 2월에는 내원(內苑)에 납시어 친히 활로 과녁을 쏘아 다섯 번을 쏘아 모두 맞춰다. 이어 국왕의 장인인 국구(國舅), 국왕의 사위인 의빈(儀賓), 종친(宗臣), 육조의 당낭(六曹堂郎), 경조윤(京兆尹:한성판윤), 장신(將臣), 승지, 사관들이 활을 쏘았다. [과녁에 적중한 자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거나 국왕이 타기 위해 기르던 말을 하사하였고, 적중 시키지 못한 장신과 의빈에게는 용두봉미(龍頭鳳尾)를 자진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위의 기록을 쉽게 설명해보면, 국왕인 영조가 친목성격의 활쏘기 대회를 열어 실력이 떨어지는 신하들과 사위들에게 ‘용두봉미(龍頭鳳尾)’를 ‘자진해서’ 바치도록 하명한 것이다. 활을 제대로 못 쐈으니, 돼지고기와 닭고기로 한턱 쏘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용두봉미(龍頭鳳尾)’에는 해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한상 푸짐하게 차려 우스갯소리로 ‘용’이니 ‘봉’이니, ‘왕’이니 ‘신하’니 하며 서로 담소를 나누며 웃고 즐기는 친목모임을 풀어간 것이다. 

영조는 유독 종친들과 활쏘기 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조선후기에는 실질적으로 진행한 적이 없었던 국왕과 신하들의 활쏘기 의례인 대사례(大射禮)를 진행할 정도로 활쏘기를 통한 정치적 행보를 자주하였다. 이때 국왕은 ‘웅후(熊侯)’라고 하여 곰의 얼굴이 그려진 곳에 활을 쏘고, 국왕의 활쏘기가 끝나면 신하들은 과녁을 교체하여 ‘미후(麋侯)’라는 사슴의 얼굴에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군사훈련 때에 군사들은 ‘시후(豕侯)’라고 하여 멧돼지 얼굴을 과녁으로 삼았다. 그때는 계급별로 다른 과녁이 표시가 필요했다.

대사례는 군례(軍禮)의 일종으로 국왕의 군사적 위업을 알리는 가장 정치적인 의례였으며, 이 때에도 신하들 중 활쏘기를 못한 사람들은 벌주(罰酒)를 마셔야 했다. 그래서 활쏘기 실력이 늘지 않으면, 술 실력만 늘어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조가 활쏘기의 신궁(神弓)이라고 불렸던 내력도 실은 어릴 적부터 자주 봐왔던 그 모습이 각인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용두봉미라는 단어가 가장 자주 등장한 곳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면신례(免新禮)’ 관련 문서다. 면신례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통과하고 벼슬을 처음 시작하는 관원이 선배관원들에게 성의를 표시하는 의식을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정식으로 관원이 되어 녹봉(祿俸:봉급)을 안정적으로 받을 테니, 미리 고참들에게 깍듯하게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통 첫 출근하는 날,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를 올리는 ‘허참례(許參禮)’를 진행하면서 간단한 향응이 이뤄진다. 그리고 본격적인 면신례는 어느 정도 얼굴을 익힌 후 열흘 즈음 뒤에 상다리가 부러지게 진행했다.

바로 허참례부터 면신례의 그 10일 정도 사이가 ‘면신(免新)’ 즉, 신참딱지를 떼는 기간이었다. 이때 고참들은 온갖 트집을 잡아 신참을 못살게 괴롭혔는데, 그래야 면신례 때 상에 올라오는 안주의 가지 숫자와 술의 종류가 다양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면신례를 잘 마치고 나면 조직원의 일원으로 함께 동고동락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독 무관(武官)으로 출사한 관원들의 면신례는 조선시대에 혹독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다. 군대라는 독특한 조직, 조총과 활 그리고 창검을 매일같이 휴대하며 거친 삶을 살아야 했기에 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호랑이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착호군(捉虎軍)의 경우는 선배들과 직접 무기를 가지고 서로 교전을 펼쳐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는 상황이 비일비재했을 정도였다. 만약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면 얼마 못 가서 ‘호랑이 밥’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된 신고식 뒤에는 얼큰한 술 한사발과 함께 새로운 정을 트게 되는 것이다.

허나 세상살이가 모두 순조롭지 못하듯, 정말 못된 고참도 많았다. 요즘도 ‘신고식(申告式)’이란 명목으로 모진 폭행을 하거나 도를 넘는 향응을 제공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가끔은 성희롱 문제까지 신문에 언급될 정도니 꼰대를 넘어서 흡사 짐승과 닮은꼴이다.

심지어 조선시대 면신례를 치르던 신입 장교가 그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까지 발생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면신례의 악습을 공식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자는 논의가 조정회의의 안건으로 상정되기도 했다. 실제로 가혹한 폭행이나 과도한 금품과 관련된 면신례는 금지한다는 공식적인 훈령이 나오기도 했지만, 암암리에 그 악습은 멈추지 않았다.

조선후기 무관으로 등용된 임백현(林百鉉)의 면신첩(免新帖)에는 이런 내용이 잘 담겨 있다. 면신례를 통과했다는 일종의 증명서를 선배들이 직접 글과 도장을 찍어 남긴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이렇다.

“신귀 현백임에게(밑에서부터 거꾸로 읽어야 한다. 역시 해학적이다), 깊이 생각하건데 너는 불량한 재주임에도 불구하고 귀한 벼슬자리에 올랐다. ...(중간 생략)... 용두봉미(돼지고기와 닭고기)를 즉시 바치거라. 선배들 씀.”

정조는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 일종의 규칙조항인 「각청면신절목(各廳免新節目)」을 만들어 공식적으로 모든 군사 관련기관에 반포하였다. 해당 절목(節目)의 첫 문장에는, ‘내삼청(內三廳-국왕 친위 금군-내금위·겸사복·우림위)의 신참에 대한 쓸데없는 비용지출이 심각한 상황이다. 일찍이 통렬하게 바로 잡고자 했으나, 옛날의 악습만 따르다가 경황이 없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라고 시작해서 해당 최고 지휘관은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자 명심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런 신참에 대한 신고식은 각 조직의 특성을 내세우며 다양한 방식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악습’은 돌고 돌아 또 다른 ‘전통’이라는 탈을 쓰고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그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정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