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들이 학부모들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하는 건 단지 교육적 차원이었는데, 학부모 중에는 그 정보의 취득이 무슨 대단한 권한인 양 착각한 경우가 흔했다.

수업 중이든 회의 중이든 퇴근해서 휴식 중이든 걸핏하면 곤혹스럽게 하고 심지어 반말을 ‘찍찍’ 해대기도 해서 2019년 9월, 마침내 그런 행위를 교권침해로 규정했다. 서울교육청에서는 “희망하지 않을 경우, 전화번호를 비공개”로 해서 사생활을 보호하기로 했고 경기도에서도 그 필요성(사생활 침해, 인맥 공개, 부정 청탁 우려 등)과 법적 근거(개인 정보 보호)를 들어 교사의 연락처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희망하지 않을 경우” 혹은 “알리지 않아도 된다”였지만 지금은 공식적으로는 전화번호를 거의 알려주지 않는다. 그 대신 e알리미, 아이알리미, 키즈노트, 하이클래스, 아이엠스쿨 같은 모바일 가정통신이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통신 방법들은 기능이 매우 다양하고 편리해서 시시때때로 날아오는 온갖 연락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학교와 학부모, 담임과 학부모, 담임과 학생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든든한 소속감, 유대감 같은 걸 느낄 수도 있다.

또 수십, 수백 페이지의 문서도 순식간에 전달됨으로써 정보화 사회의 일상을 실감하기도 한다. 게다가 연락을 받을 때마다 클릭만으로 이쪽의 반응을 보여줄 수도 있고, 간단한 의견이나 소감을 전할 수도 있고, 담임이 편리한 시간에 직접 통화를 할 수도 있어서 별다른 미흡함을 느낄 까닭이 없다.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고 친절한가.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이 메신저가 아닌가 싶다. 무슨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초등학교 아이들은 ‘알림장’이라는 걸 적기는 하지만 업무 담당자나 담임이 학부모에게 보내주는 모바일 통신에 비하면 얼마나 조잡하고 답답한가.

문제는 한 학년이 끝났을 때다. 선생님과 아이들, 선생님과 학부모들 간의 그 끈끈하고 편리하고 친절했던 끈은 일시에 끊어진다. ‘우리 선생님’이 보이지 않게 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추상적 인물로 남는다. 우리 학교에 계시기는 할까?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을까? 이제 새 학년 담임을 만나면 그만일까?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였는지 학교 홈페이지에서도 선생님들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교장 인사말과 단정한 사진, 서명이 곁들여지던 페이지에도 ‘교직원 일동’의 몇 마디 의례적이고 짤막한 인사말뿐이다. 휑뎅그레하다. 다 숨어버린 느낌이다. 하기야 메신저가 다 알려주니까 평소엔 굳이 홈페이지를 볼 여유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까 1년간 우리 아이를 가르쳐주신 ‘우리 선생님’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암담하다. 정이 들어버린 아이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까? 그러기에 미리 휴대전화 번호를 물어 놓았어야 할까? 그랬다가 가르쳐 주기가 어렵다고 하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피차 얼마나 곤혹스럽겠는가.

지긋지긋한 학생,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학부모도 있을 순 있다. 그런 선생님도 있을 순 있다. 그렇지만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 삭막한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 선생님’은 있고 그 ‘우리 선생님’을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생각보다 많다. 그건 경험으로도 알 수 있고 여러 차례의 공식적인 조사 결과도 있어서 선생님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런 관계를 왜 뿌리쳐야 할까? 그건 교육적으로 얼마나 가혹한 처사일까?

그새 시책이 ‘교사 전화번호 전면 비공개’로 굳어졌고 그 배경에 무슨 큰 철학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르고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중요한 건 있을 수 없다. 전화번호 공개 여부나 공개시기를 선생님들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도 좋지 않을까? 학년이 바뀔 때라도 좋지 않을까? 무슨 권한으로 제자들을 뿌리치고 숨어버리듯 사라지고 몰래 전근을 가야 하겠는가?

교사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이들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가게 된다. 30~40년 가르치고 나면 수백, 수천 명이 줄을 설 것 같지만 결국 몇 되지 않을 것을 미리 짐작해두어도 좋을 것이다. 무슨 사정이 그리 팍팍해서 그리워하는 아이들을 두고 숨어서 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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