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서당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반계서당 전경.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지난 5월 21일 화성연구회 회원들이 봄 답사로 부안 변산반도 일원을 다녀왔다. 이번 답사는 코로나19로 인해 2년 반 만에 진행됐다. 오랜만의 답사라는 것도 있었지만 수원화성과 인연이 있는 반계 유형원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라서 참으로 의미가 있는 답사였다. 

이번 답사는 박옥희 부안 문화관광해설사의 해설도 좋았지만, 화성연구회 부이사장을 맡고 있는 한신대학교 김준혁 교수의 해설이 있어 더욱 의미 있는 답사가 됐다. 김 교수는 오늘 우리가 찾은 반계서당은 화성연구회의 태동을 만들어준 시발점이라는 설명에 모두가 공감한다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오늘날 수원이 만들어지는데 기초를 놓은 사람은 반계 유형원이다.

정조는 반계 유형원의 학설을 받아들여 팔달산 자락에 신읍을 건설하고 화성축성을 결행했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명해 화성을 기획하고 설계를 맡겼다. 화성건설은 지난 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화성성역소의 총리대신 번암 채제공, 화성유수겸 감동당상인 조심태, 감동 이유경과 화성성역소에서 일한 376명의 관리직과 장인 1840명이 참여했다. 

반계 유형원은 아버지 유흠과 어머니 여주이씨 사이에서 1622년 1월 21일 서울 소정릉동(지금의 정동) 외숙 이원진 집에서 태어났다. 1623년 두 살이 되던 해 유형원의 아버지 유흠은 인조반정의 혼란 속에서 ‘유몽인(柳夢寅)의 역옥’에 연류됐다는 누명을 쓰고 옥사했다. 

반계의 가계를 살펴보면, 부친 유흠은 문과급제하고 예문관 검열(檢閱)의 관직을 지냈다. 외가는 여주 이씨로 우참찬을 지낸 이지완의 딸이다. 이지완은 성호 이익의 종백조(큰할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은 외 6촌이 된다.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은 수원의 터줏대감인 고려말 한림학사를 지낸 망천 이고(李臯) 선생 큰형님의 후손이다.

유형원은 5세가 되면서 외삼촌 이원진과 고모부 김세렴으로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5세때 병자호란을 만나 가족들과 원주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반계는 위기의 시대를 살았다. 임진왜란(1592~1599)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 다시 닥쳐온 병자호란(1636)을 직접 겪어야 했다. 

그는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고 백성들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라가 부강해야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정치는 단순히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틀에 의해 시행돼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뒷날 반계수록 집필의 계기가 됐다.

반계의 고향은 경기도 지평, 오늘날 양평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정국이 되자 남인 집안이었기에 중앙 정계에 진출이 어려운 여건이었다. 특히 부친의 죽음으로 어린 시절부터 출세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백성을 착취하는 권력자들을 보면서 서울 인근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반계는 과거 공부를 하는 대신 고모부인 김세렴이 함경감사로 임명되자 그를 따라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를 여행하며 백성들의 고통 받는 실상을 피부로 느끼고 현실과 실제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영남을 유람하며 세상을 피해 살 곳을 찾아 다녔다. 이러한 전국의 유람은 향후 학문의 방향성을 잡는데 밑바탕이 됐다. 

그러던 중 어머니와 조부모 상을 당하게 되자 본가에 들어와 살게 됐다. 반계는 조부의 염원으로 소과 시험에 응시해 진사에 합격함으로써 최소한 선비로서 갖춰야 할 기본자격만 얻었을 뿐이었다. 이후 벼슬길로 나가는 관문인 문과시험에 한번 낙방한 뒤로는 과거의 뜻을 완전히 접었다. 

반계는 조부의 사패지(왕이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린 땅)가 있는 부안현 우반동으로 내려가게 됐다. 그곳 백성들의 어려운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토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사회는 양반 사대부와 기득권층이 토지를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소작료와 세금, 군역을 지게 됨으로 고통 속에 살아가야 했다. 

반계는 당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방을 튼튼히 함은 물론이고 토지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개혁 정신이 바로 반계 실학사상의 핵심이다. 부안 우반동에 낙향한 그는 만여 권에 달하는 장서와 함께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우반동에 내려오자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제자양성과 학문,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자료=위키백과 참조)
(자료=위키백과 참조)

반계수록은 반계의 폭넓은 독서와 전국유람, 당대 대학자들과의 대담, 그리고 농촌 생활에 대한 체험 등을 바탕으로 집필이 진행됐다. 부국강병과 농촌경제의 안정책 등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방안을 다룬 국가체계의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는 책이 됐다. 반계수록은 총 13책 26권으로 구성됐다. 
 
반계수록은 무려 19년의 기나긴 집필과정을 거쳐 그의 나이 49세(1670년)에 완성됐다. 이 책은 그가 생존 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계수록은 덕촌 양득중과 성호 이익, 그의 제자 순암 안정복에 의해 세간에 알려지고 칭송을 받게 됐다. 양득종은 1750년 영조에게 간행을 추천하는 상소를 올려 드디어 3부가 간행돼 남한산성과 사고에 보관됐다.

1770년 영조는 다시 경상관찰사에게 목판인쇄를 지시해 널리 전파됐다. 이후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개혁군주 정조였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신원복권(伸冤復權)을 위해 아버지의 묘를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런데 선조와 효종의 능자리로 결정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수원부 읍치를 옮겨야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정조실록 정조17년 12월 10일 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정조17년 12월 10일 기사. (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정조실록 (정조실록 정조17년 12월 10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 처사(處士) 증(贈) 집의(執義)겸 진선(進善) 유형원은 그가 지은 ‘반계수록 보유’에서 말하기를 수원도호부는 광주의 아래 지역인 일용면 등지를 떼어 보태고 읍치를 ‘평야로 옮기면 내를 끼고 지세를 따라 읍성을 쌓을 수 있다’ 하고, ‘읍치의 규모는 평야가 매우 훌륭하여 참으로 큰 번진(藩鎭)의 기상이 있는 지역으로서 안팎으로 만호를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을 쌓는 부역은 향군(鄕軍)이 번을 드는 대신 내는 재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그 사람은 실용성 있는 학문으로 국가의 경제에 관한 글을 저술하였으니, 기특하도다. 그가 수원의 지형을 논하면서 읍치를 옮기는데 대한 계책과 성을 쌓는데 대한 방략을 백 년 전 사람으로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았고, 면(面)을 합치고 번(番)을 드는 대신으로 돈을 내게 하는 등의 세세한 절목에 있어서도 모두 마치 병부(兵符)를 맞추듯이 착착 들어맞았다. 그의 글을 직접 읽고 그의 말을 직접 썼더라도 대단한 감회가 있다고 할 터인데,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과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쓰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아침저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정조는 반계의 주장에 탄복하고 사도세자 묘의 이장과 신읍 건설을 결심하게 된다.

반계의 이러한 생각은 뒷날 성호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했다. 특히 정약용은 정조의 지시로 화성축성을 기획하고 불후의 명작을 설계하게 됨은 반계의 학설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반계의 주장으로 건설된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됐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국난극복 사업을 전개했다. 특히 역사현장 복원사업을 펼치게 되자 당시 수원의 국회의원 이병희 무임소장관은 화성복원 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이끌어 내게 된다.

이어 민선시대를 준비하던 심재덕 수원문화원장은 화성행궁 자리에 있던 수원의료원의 개축을 저지하는 시민운동을 벌여 화성행궁을 복원하게 된다. 이어 초대 민선시장에 당선된 심재덕은 화성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사업에 착수해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쾌거를 거두게 된다.

화성연구회 반계서당 답사 기념사진.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성연구회 반계서당 답사 기념사진. (사진=이용창 사진작가)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자 화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화성사랑모임’을 결성했다. 이후 화성사랑모임은 ‘사단법인 화성연구회’로 발전했다. 화성연구회는 화성의 복원, 정비, 연구, 홍보 사업을 25년간 전개하고 있다. 수원화성은 선각자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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