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문 실명판. 감동 전목사 김낙순, 전부사 이방운, 패장 가선 이도문, 한상희, 임준창, 전오위장 신속, 석수 가선 김상득 등 85명이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문 실명판. 감동 전목사 김낙순, 전부사 이방운, 패장 가선 이도문, 한상희, 임준창, 전오위장 신속, 석수 가선 김상득 등 85명이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사진=김충영 필자)

수원화성 축성에는 1821명의 장인(匠人)이 참여했다. 대부분의 장인은 서울과 수원, 개성에서 왔다. 그중에서도 서울의 공조(工曹)나 군영에 속한 장인들이 우선적으로 공사에 참여했다. 이들 서울관청에 속한 장인들은 기술 수준에서 비교적 우수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수원화성은 서울의 우수한 기술 인력에 의해 조성될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의 명단에 올라있는 장인의 인원수를 직종별로 정리해보면 22개 직종의 장인이 참여했다. 석수나 목수 외에 많은 직종은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직종도 많았다. 석수, 목수 다음으로 나오는 니장(泥匠)은 미장이를 지칭하며, 와벽장은 벽돌을 굽는 장인이다. 야장(冶匠)은 대장장이로 석공사에 필요한 각종 철재연장을 만들어서 석수들에게 공급했다.

개장(蓋匠)은 지붕에 기와를 덮고 기와를 굽는 장인이다. 차장(車匠)은 수례를 만드는 장인이고, 화공(畫工)은 건물에 단청을 칠하는 일을 한다. 가칠장(假漆匠)은 단청을 칠하기 전 미리 바탕칠을 하는 장인이다. 대인거장, 소인거장, 기거장, 걸거장은 모두 톱을 다루는 장인인데 톱의 종류에 따라 명칭이 나뉜다.

조각장은 건물의 세부 공간을 장식하는 조각을 담당하는 장인이다. 마조장(磨造匠)은 연자매를 만드는 장인이고, 목혜장(木鞋匠)은 나막신을 만드는 장인인데 맷돌을 만들었는지 나막신을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선장(船匠)은 배만드는 장인인데 건축공사장에서 용마루나 추녀목을 다듬는 일을 주로 맡았다.

안자장(鞍子匠)은 말안장을 만드는 장인이다. 병풍장(屛風匠)은 병풍을 만드는 장인인데 어떤 일을 했는지 분명치 않다. 박배(朴排)장은 문짝에 돌쩌귀, 고리, 배목 등을 박아서 문틀에 끼워 맞추는 일을 했다. 부계장(浮械匠)은 지금의 비계라고 부르는 건물주변에 설치하는 가설물을 만드는 장인이다. 

(자료=화성성역의궤 정리)
(자료=화성성역의궤 정리)

회장(灰匠)은 석회를 구워내는 장인으로 화성 축조에서는 벽돌을 쌓을 때 석회를 많이 사용했다. 직종별로 장인의 인원수를 살펴보면 석수가 642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목수가 335명, 니장 295명, 와벽장 150명, 야장83명 순으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나머지는 30~40명 정도이고 회장, 박배장, 병풍장은 1명만 기록되어 있다.

장인이 동원된 지역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거의 모든 직종이 동원됐다. 모두 합치면 1092명으로 전체 장인의 약 60%에 해당한다. 그 다음 수원부는 특수한 직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종에서 131명이나 참여했다. 다음으로 개성부는 133명이 참여해서 수원보다 많은 수가 동원됐다. 광주부가 16명, 강화부가 40명, 기타 경기도 관내에서 115명이 참여했다. 

그 외 충청도와 강원도, 황해도 경상도는 석수와 목수를 보냈는데 충청도는 58명, 강원도는 33명, 황해도 76명, 전라도 41명, 경상도 31명, 평안도 62명, 함경도 3명이어서 공사현장에서 멀수록 동원된 인구수가 적음을 알 수 있다. 

출신지와 직종을 살펴보면 석수는 거의 전국에서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원수에서도 서울이 209명이고 각 지방이 거의 50~60명 정도씩 골고루 분산돼 동원됐다. 목수는 전국적으로 동원됐지만 서울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각 지방에서는 10명 정도가 동원됐다. 나머지 직종은 거의 서울에서 국한돼 동원됐음을 알 수 있다.

그중에 화공은 서울 5명, 경기도 28명이 동원됐는데 이는 양주에 있는 사찰의 승려가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서울 장인 1092명 중에는 신분이 관청이나 군영에 소속된 장인이 393명으로 전체 장인의 36%를 차지하였다. 나머지 699명은 민간신분의 사장(私匠,개인장인)이었다.

관청은 공조 산하의 선공감, 내수사 등이었고, 군영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소속이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공전(工典) 공장(工匠,장공인)조에 ‘경공장(京工匠,중앙관청이 장공인)과 외공장(外工匠, 지방관청의 장공인)은 대장(臺帳)을 작성해 공조나 본 관청, 해당 관찰부, 해당고을에 보관한다. 개인노비는 장공인에 소속 시키지 않으며 장공인은 나이가 60살이 차야 신역에서 면제한다.’고 규정했다. 

중앙관청의 관리대상의 장공인은 능라장(綾羅匠, 비단짜는 장공인)을 비롯해 98개 직종을 선발해 관리했다. 장공인을 관리할 수 있는 기관은 공조, 봉상시, 내의원, 상의원, 군기시, 교서관, 사옹원,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예빈시, 사섬시, 선공감, 제용감, 장악원, 관상감, 전설사, 전함사, 내수사, 소격서, 사온서, 의영고, 장흥고, 장원서, 사포서, 양현고, 조지소, 도화서, 와서, 귀후서 등 30여개 기관이었다.

그리고 지방관청이 관리할 외공장(外工匠)은 팔도 관찰사와 유수부, 모든 고을, 군영 별로 관리할 장인의 직종 및 인원수를 정해주었다. 이를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관공서별 기술직 정원(T/O)규정이라 할 수 있는 제도였다. 이들을 관장(官匠,관청에서 보유한 장인)이라고 불렀다. 관청소속이 아닌 장인을 사장(私匠)이라고 했다. 

화성성역은 서울의 관청인 내수사, 장용영,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용호영, 선공감, 경기감영, 수어청, 총융청, 상의원등 11개 기관 소속 14개 직종 393명의 관장들과 사장 699명, 지방의 장인729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당시 최고수준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한 예로 1789년 현륭원 조성시 신읍으로 이주한 244명중 성역에 참여한 장인은 목수 김여휘 1인 뿐이었다.

화성은 비록 지방의 성곽이지만 궁궐을 짓던 당대 최고 기량의 장인들이 참여해 지은 당대 최고 수준의 건축물이었던 것이다. 화성축조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점은 석수나 목수, 기와장이, 미장이 중 67명의 편수가 있어서 우두머리 역할을 했다. 이들 우두머리를 석수편수, 목수편수, 니장편수라 불렀다.

화성성역의궤 권4 공장(工匠) 석수편. (자료=화성성역의궤)
화성성역의궤 권4 공장(工匠) 석수편. (자료=화성성역의궤)

이들 중에는 특히 활동이 두드러진 인물들이 있었다. 직종별로 살펴보면 서울 내수사 소속의 관장으로 석수 한시웅, 송도환, 김상득, 김차봉, 박상길과 훈련도감 김중일, 금위영 박완석, 선공감 최유토리 등이 관장으로서 편수로 일했다. 사장(私匠)석수 중 편수는 서울출신 최홍세, 류보한, 김시태, 최귀득, 황석기 등이 있다. 

그리고 지방출신 편수는 개성부 고복인, 김백이, 강화부 차어인노미, 이복기, 청주출신 강악지, 강원도 안협 출신 김영대, 전주 김성손, 대구 서귀삼, 평안도 정주 김명보, 평안도 곽한, 이정빈 등이 편수로 일했다.

그리고 목수 편수로는 서울 출신 정복룡, 권성문, 김성인, 양세득, 한천석, 이귀재, 손삼득, 손동현, 민백록, 이광록, 박쾌득 등이 일했다. 수원출신으로는 한진옥, 김치한이 일했고, 기타 지방 출신으로는 강원 회양출신 윤사범, 승려 굉흡이 일했다. 굉흡은 장안문과 방화수류정, 북서포루에서 일했다. 편수가 배치된 직종은 석수, 목수, 미장이, 와벽장(벽돌굽는 장인), 야장(대장장이), 개장(기와 잇는 장인)이 있었다. 

수원화성은 서울의 11개 관청에 소속된 393명의 관장과 서울의 사장 699명, 지방 팔도의 729명으로 구성된 1821명의 명장이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건설했다. 불후의 명작을 남긴 조선 최고 명장들의 노고를 현양(顯揚,이름이나 지위를 세상에 들날림)하는 사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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