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을 만든 장인 명패 시안. 김작근노미, 노차돌, 권수대, 김개노미, 전광세, 김작근노미, 쇠고치. (자료=김충영 필자)
화성을 만든 장인 명패 시안. 왼쪽부터 김자근노미, 노차돌, 권수대, 김개노미, 전광세, 김자근노미, 쇠고치. (자료=김충영 필자)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누구의 작품일까?

수원화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정조대왕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살이 되던 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24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이어 1776년 조선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했지만 1786년(정조10년) 문효세자의 죽음으로 후사가 사라졌다. 1789년 7월 11일 임금의 고모부 금성위 박명원이 “왕자가 없음은 사도세자의 묏자리가 길지가 아니므로 명당으로 이장해야 한다”고 상소함에 따라 현륭원 조성과 수원읍의 이전이 추진된다.

구 수원읍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은 반계 유형원이다. ‘수원현미경 73회’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구읍은 산으로 둘러있어 발전에 지장이 있다고 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북쪽의 넓은 평야지로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조가 받아들임으로서 화성건설이 시작된다.   

정조는 젊은 학자 정약용에게 설계를 지시했다. 정약용이 ‘성설’을 작성해 정조에게 올리자 정조는 그의 설계를 받아들여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 정조의 화성기본계획)으로 발표한다. 화성설계가 마무리되자 화성성역소를 만들었다. 책임자로는 총리대신 채제공, 감동당상 화성유수 조심태, 감동 이유경을 임명해 성역 추진을 준비케 했다. 

성역소에 376명의 관리직과 1821명의 장인들이 참여해 1794년 정월에 화성축성을 시작했다. 당초 계획은 10년에 걸쳐 추진하는 계획이었으나 실명제와 성과급제, 조선의 역량을 집결하는 운영으로 34개월 만에 축성을 완료하는 쾌거를 이루게 된다. 이는 당대 정조를 정점으로 총리대신 채제공 이하 모든 참여자들의 높은 사명감의 산물이었다.

정조는 화성축성이 마무리 되어가자 화성성신(華城城神)을 모시는 사당건립을 지시했다. 이는 많은 인재들이 이룩한 화성을 후대 천년만년 이어지도록 하려는 정조의 의중이었다. 이렇게 하여 화성은 1796년 9월 10일 축성이 완료됐다. 

정조는 화성건설을 완료하고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면 임금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화성에 와서 상왕으로 살고자 했다. 하지만 1800년 정조는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뒤를 이은 순조는 건릉 재실에 모셨던 정조의 영정을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해 모시게 했다. 

이렇게 하여 수원화성에는 화성성신을 모신 사당과 정조의 영정을 모신 사당 화령전이 건립됐다. 이후 화성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을 잃게 된다. 성신사가 이 시기 유실됐으나 2009년 복원됐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국방유적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이 때 이병희 국회의원이 수원화성복원을 이 사업에 포함시키게 됨에 따라 화성은 잃었던 모습을 되찾게 됐다. 

심재덕 당시 수원문화원장은 행궁터에 있던 경기도립 수원의료원 재축을 막아내고 화성행궁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뒤이어 수원시장에 당선된 그는 화성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킨다. 이때 필자는 세계문화유산 화성에 관심을 갖고 시작한 화성사랑모임은 사단법인 화성연구회가 됐다. 그리고 공적으로는 수원시 도시계획과에서 화성주변정비계획을 수립하는 등 화성업무를 담당했다. 

2003년에는 여러 부서에서 추진하던 화성관련 업무를 화성사업소를 설립해 화성의 복원, 정비, 홍보 및 공연업무 등 화성의 모든 업무를 담당했다. 화성사업소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팔달문의 변형과 안전 관련 업무도 담당했다. 

2009년 화성사업소장에서 건설교통국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됨에 따라 화성업무를 더 이상 담당하지 않았다. 이후 팔달문의 변형이 심각해지자 문화재청은 팔달문 해체보수 판정을 내렸다. 2012년 팔달문 공사장에서 변형이 심해 사용이 불가한 부재를 쌓아놓은 나무더미를 보았다. 

팔달문 해체 보수공사 현장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문 해체 보수공사 현장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순간 이 나무들을 어떻게든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화성을 만든 사람들의 명패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1796년 팔달문을 건립할 때 사용된 목재였기에 당시 장인들과 동시대를 함께한 나무이고, 또한 이들의 손에서 다듬어져 팔달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팔달문의 못쓰게 된 나무는 바로 화성을 만든 장인들의 몸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나무에 장인들의 이름을 새기면 혼이 스며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2012년 당시 수원시의 책임자에게 이러한 내용을 건의를 했다. 그런데 검토하겠다는 말을 듣고 기다려 보았는데 별다른 답이 없었다. 

팔달문에서 나온 못쓰게 된 부재.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문에서 나온 못쓰게 된 부재. (사진=김충영 필자)

2013년 명예퇴임을 하고 수원시 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팔달문의 못쓰게 된 부재의 소재를 알아보게 됐다. 일부는 화성박물관으로 이관되었고 많은 부재들은 폐기되고 말았다. 안타까웠다. 그래서 ‘수원시가 안하면 내가 서각을 배워서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을 했다. 

2005년 화성행궁의 현판작업을 한 김각한 선생이 생각났다. 당시 김각한 선생은 무형문화재 106호 각자장(刻字匠)이 되어 한국문화재재단 산하 한국건축공예학교에서 각자반을 지도하고 있었다. 김각한 선생이 지도하는 각자반에 입학하여 3년간의 과정을 이수하게 됐다. 

팔달사 수령 100년 은행나무, 뒤편 4~5m 낮은 집으로 나무가 기울어 위험한 상태. (사진=김충영 필자) 
팔달사 수령 100년 은행나무, 뒤편 4~5m 낮은 집으로 나무가 기울어 위험한 상태. (사진=김충영 필자) 

2014년 봄 어느 날 팔달문 인근에 있는 팔달사에서 수령 100년이 되는 은행나무가 위험하여 벤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소식은 팔달사 혜광스님이 여주 목아박물관 박찬수 관장님에게 필요하면 가져다가 불상을 만들어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친구인 경기데일리 박익희 발행인에게 전화가 왔다. 그래서 필자도 나무를 베는 과정을 지켜보게 됐다. 그리고 1년쯤 지나서 팔달사에 가보니 1년 전에 벤 은행나무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래서 주지스님께 저에게 주십사 하고 말씀을 드렸다. 

명패목을 만들기 위해 제재하는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명패목을 만들기 위해 제재하는 모습. (사진=김충영 필자)

스님은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고 해서 화성을 만든 장인들 명패를 만들려고 한다고 말씀을 드리니 흔쾌히 저에게 주셨다. 그래서 2년 정도 건조하여 2400여개의 명패목을 만들어 놓았다. 

필자는 화성과의 인연으로 공직 생활을 했고 행복한 노후 생활을 하고 있다. 이에 화성과의 소중한 인연을 화성을 만든 사람들을 기리는 일로 평생사업을 하려고 한다.

이제 각자(서각)를 공부한지 8년이 지났다. 화성을 만든 장인들 이름을 명패목에 새길 시기가 온 것 같다. 

화성을 만든 화성성역소의 관리직 376명, 장인 1821명 등 2197명에 더해 정조대왕, 유형원, 정약용, 이병희, 심재덕의 이름을 새기려 한다.  

필자의 바램이라면 수원시가 이들 명패목을 모실 수 있는 사당을 지어주길 감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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