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 중 협도(挾刀)관련 그림이다. 중국은 ‘화식(華式)’, 일본은 ‘왜식(倭式)’, 조선은 ‘조(朝)’나 ‘선(鮮)’이 아닌 ‘금식(今式)’으로 표현하였다. 바로 지금 우리 군사들에게 쓸모 있는 무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수록된 무예 중 협도(挾刀)관련 그림이다. 중국은 ‘화식(華式)’, 일본은 ‘왜식(倭式)’, 조선은 ‘조(朝)’나 ‘선(鮮)’이 아닌 ‘금식(今式)’으로 표현하였다. 바로 지금 우리 군사들에게 쓸모 있는 무기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정조시대 수원 화성(華城)을 쌓는 일은 단순한 군사 전략적 관방(關防)을 넘어 신도시의 건설을 통한 서울로 집중된 권력의 분할과도 맞닿아 있다. 지금도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숫자가 서울에서 바글바글 거리며 살고 있지만, 조선후기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점점 더 도성(都城)으로 몰려들어 성 밖에까지 점차 서민들의 주거지가 확대되었다.

사람은 자본을 쫓아다닌다. 자본이 축적되고, 인구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정치권력은 강화된다. 그렇게 강화된 권력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부패한다. 제 아무리 법과 제도를 가지고 통제한다고 할지라도 그 한계는 명확하다. 부패한 권력은 더 많은 자본을 요구하고, 더 악독한 부패로 직결된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전가된다. 

그래서 권력분산의 기본에는 공간의 재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조는 서울이라는 기득권 독점 권력을 해체하기 위하여 수원에 화성을 쌓고, 새로운 상업도시를 표방하는 공간을 창조해낸 것이다. 지금도 다양한 정부관련 공공기관들이 세종이나 전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분산되어 조금씩 이전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사랑했다. 그 사랑의 결과물들을 각종 국정보고서의 일종인 의궤(儀軌)나 병법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핵심에는 3권의 책이 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그것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하고 그곳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세운 수원 화성은 효의 본심을 담은 지킴의 상징체였다. 그런 섬세한 지킴의 마음을 담은 것이 『화성성역의궤』다. 화성을 이루고 있는 모든 건물들은 물론이고, 성돌 하나하나까지도 섬세하게 그렸다. 거기에 그 성을 쌓았던 도구들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아버지를 그리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정조가 직접 말을 타고 수원 화성을 향했던 8일간의 화성행차 내용이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담겨있다.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와 동갑이신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잔치를 위한 특별한 여정길을 펼쳐 놓은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수천의 군사들과 수원 화성에서 진행했던 야간군사훈련의 모습까지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마지막으로 수원 화성을 지켰던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의 무예를 통일화 시킨 책이 『무예도보통지』다.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을 비롯한 도성 방위의 핵심 군영뿐만 아니라 전국의 속오군까지 무예훈련을 통일시키기 위해 병서를 편찬한 것이다. 또한 자세한 무예동작의 설명은 기본이고, 해당 무예를 익히기 위한 무기를 만드는 재원과 그 무예의 역사적 의미까지도 모조리 한 곳에 모아 놓은 책이다. 그 책의 서문에는 정조가 ‘이 책을 한번만 폈다하면 무예의 신묘한 작동법을 스스로 깨닫게 할 수 있을 정도라고’ 칭찬한 내용이 있을 정도다.

이 3권은 책은 모두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등재되었을 정도로 의미가 깊은 책이다. 정조시대 수원 화성과 관련한 이 3권의 책을 관통하는 것이 ‘실용(實用)’이다. 실용의 정신은 실제로 당대에 뜻깊게 사용할 수 있고, 그 의미를 통해 미래의 후세들이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담긴 것이다. 

수원 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부분 파괴되었지만, 『화성성역의궤』라는 당대 최고의 공사보고서를 바탕으로 다시금 복원하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되었다. 그리고 『원행을묘정리의궤』는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바탕으로 정조시대 왕실 문화의 미시사적인 음식문화나 복식문화 그리고 군사행렬에 관한 내용까지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 받는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는 중국에서 전래된 쌍수도나 일본에서 전래된 왜검을 비롯하여 몽골이나 북방기마민족과 연결된 다양한 마상무예들이 조선 군사무예 속에 녹아내린 흔적을 살필 수 있다. 이를 통해 당대의 군사무예의 변용양상이나 신체문화까지도 엿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정조시대를 관통하는 ‘실용’의 정신을 『무예도보통지』에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정치인들은 ‘실용’의 정책을 풀어내고, 백성들은 ‘실용’의 생업을 지키고, 
  문학인들은 ‘실용’의 서적을 펼쳐내고, 군사들은 ‘실용’의 무예를 익히고, 
  상업인들은 ‘실용’의 재화를 유통하고, 공인들은 ‘실용’의 기계를 만든즉, 
 나라를 지키는데 무슨 근심이 있을 것이며, 백성을 보호하는데 무슨 환난이 있겠습니까!”

“朝廷講實用之政 黎庶守實用之業 文苑撰實用之書 卒伍肄實用之技 
 商賈通實用之貨 工匠作實用之器 則何慮乎 衛國何患乎 保民也哉” 
                                                (『무예도보통지』 「병기총서」)

 만약에 반대로, 국가의 정사를 살피는 정치인들이 자파의 이익만을 위하여 거짓된 정책을 펼치면 나라는 망한다. 경제의 기본 바탕인 백성들이 헛된 망상을 꿈꾸며 흥청망청 거리면 가족과 마을 공동체가 망한다. 학문의 중심축인 문학인들이 글쓰기를 게을리 하고 해괴한 이론만 들먹거리면 학문의 세계는 저문다. 

국방의 기초인 군사들이 제 몸 훈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기를 날카롭게 벼르지 않는다면 전쟁의 위협에 노출된다. 물류의 소통을 담당하는 상업인들이 진취성을 잃고 독과점적인 이익에만 몰두한다면 물류의 흐름이 막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산업 활동의 기둥인 공업인들이 불량한 기계를 만들거나 제대로 보수 활동을 펼치지 않는다면 기계는 멈춘다.

그렇게 되면 몇몇 소수의 기득권층만 부와 명예를 독점하여 나라를 지키는 것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될 것이며,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묘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좌파나 우파에 가리지 않고 ‘무엇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에 대한 부분이다. 

『무예도보통지』에 ‘용(用)’이라는 글자와 함께 가장 자주 등장하는 글자가 있다. ‘금(今)’이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반드시 ‘쓸모’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실용(實用)’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今)’은 ‘미래’로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흔히들 ‘실학(實學)’이라는 이름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논하면서도 종종 헛된 이론의 세계로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오로지 미래의 후세들을 위하여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실용정신인 것이다. 

지금은 조금 고통스럽고 힘겹더라도 자신의 입이 아니라, 후세를 위하여 땀 한방울을 더 흘려야 하는 것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저작권자 © 수원일보 - 특례시 최고의 디지털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