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만 읽는 바보, 『무예도보통지』를 고증하다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에 실린 「간서치전」 부분이다. 책만 읽는 바보는 그렇게 책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이덕무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에 실린 「간서치전」 부분이다. 책만 읽는 바보는 그렇게 책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 그는 서얼로 태어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정조를 만나 인생을 꽃피운 인물이다. 특히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도 중국의 각종 병법서는 물론이고 일본의 무예서까지 직접 살펴 해박한 고증을 해냈다. 이덕무의 별명은 ‘간서치(看書癡)’였다. 스스로를 오직 책만 읽는 바보라고 부른 것이다. 

그의 문집인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보면, 마치 제3자의 눈으로 자신을 소개한 글이 있다. 그 제목이 「간서치전(看書痴傳)」 즉, ‘책만 읽는 바보의 이야기’라는 글이다. 그 내용이 길지 않으니 한번 보면 이렇다.

 “목멱산(木覓山:서울 남산의 별칭)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 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 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동창·남창·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 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을 구한 것을 알았다. 자미(子美: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자)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더욱 좋아하여 앓는 사람처럼 웅얼거렸다. 깊이 생각하다가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엄청 좋아하며 제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기를 반복했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가마귀가 부르짖는 듯하였다. 혹은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看書痴)’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의 전기(傳記)를 써 주는 사람이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看書痴傳)」을 만들고 그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지는데, 방안에서 그 해의 움직임에 따라 책을 읽으며 쫒아 다녔을 정도니 그냥 책을 눈에 떼지 않는 일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책읽기의 즐거움으로 추위와 배고픔까지도 잊혀질 정도였다고 하니 그 깊이가 남달랐다. 필자의 자호(自號)로 쓰고 있는 ‘지과치(止戈痴)-무예만 아는 바보’도 실은 이덕무를 흠모하여 붙인 것이다.

그런 소문은 종종 저자거리를 넘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주변에 좋은 인재를 찾기 위해 애를 썼던 정조는 자연스레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에게 눈길이 갔다. 박제가와 유득공을 비롯한 북학파(北學派)로 불렸던 그들은 청나라의 문물을 직접 눈으로 체험하며 조선의 문화발전에 애를 썼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 무예에 뛰어난 이가 『무예도보통지』의 무예실기 고증을 담당했던 백동수(白東修)였고, 이덕무와는 처남 매부지간이었다. 바로 백동수의 누님과 이덕무가 혼례를 올렸기에 자연스레 이덕무의 친구들과 백동수가 한자리에 어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만남의 장소가 지금의 탑골공원(파고다공원)으로 불리던 원각사지 10층 석탑 주변이었다. 지금은 자동차 매연을 비롯한 공해로 검게 그을리고 수많은 비둘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유리장 안에 가둬져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 탑이 하얀 모습이었다. 그래서 ‘백탑파(白塔派)’라고 불렸다. 얽히고설킨 인생들이지만, 대부분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속에서도 ‘북학파’라는 신학문을 공부하고 토론하며 미래를 꿈꿨던 사람들이었다.

간서치(看書癡), 정조를 만나다

그 중 이덕무는 정조의 눈에 쏙 들었다. 정조처럼 책을 사랑하고 백과사전을 능가하는 박학다식이라 몇 마디만 나눴을지라도 마음에 새길 정도였다. 그렇게 이덕무는 정조가 만든 학문발전기관이니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檢書官)이 되었다. 규장각은 1776년 9월, 정조가 즉위와 동시에 세운 문치(文治)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검서관이라는 자리는 그 중추였다.

정조는 1779년 3월 27일, 검서관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고 인재를 살폈다. 아니 이미 이덕무를 비롯한 서얼이지만 뛰어난 실력을 가진 그들을 품어내기 위해 ‘검서관’이라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반쪽짜리 양반인 서얼 중 문예가 뛰어났던 4명이 발탁되었다. 

정조 때 새롭게 만들어진 법전인 『대전통편(大全通編)』을 보면 ‘검서관은 4명으로 5품 참외(參外)직이다’라고 하였다. 보통 6품 정도가 지방관으로 나갈 품계이니 파격적 대우였다. 과거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해도 6품인데, 규장각 검서관이 5품 대우를 받는 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그렇게 1779년 6월, 처음으로 규장각으로 입성한 검서관은 서얼이지만 당대 최고의 학자로 소문났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였다. 그들 중 이덕무는 서른 아홉으로 가장 나이가 많았고, 유득공(31), 서이수(30), 박제가(29)는 또래였다.

검서관으로 뽑힌 사람들의 임기는 30개월이었다. 그런데 임기가 만료되면 그냥 모두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 중 2명을 홍문관(弘文館)에서 임의로 선발해 겸검서관(兼檢書官)에 임명하고 서반 체아직(遞兒職)의 형태로 운영하도록 하였다. 특히 겸검서관은 정원제한이 없어 그 숫자를 계속 늘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품은 검서관들의 신분을 보장한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꿈을 쫓아가기에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일성록(日省錄)』을 살펴보면, 1790년 6월부터 이덕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입직(入直) 즉, 숙직을 서며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덕무는 주변에서 ‘겨우 몸이나 지탱할 정도로 몸집이 가냘팠다’라고 언급할 정도로 체력이 약했다. 하지만, 국왕이 내려준 좋은 벼슬이 과거 급제와 다를 바가 없다라고 스스로 말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는 수많은 책을 읽으며 마음의 안식을 규장각에서 찾았다. 젊었을 때는 마음은 부유했지만, 가난의 사슬을 벗어내지 못했었다. 오죽했으면, 자신이 읽던 『맹자(孟子)』 일곱 권을 팔아 밥을 배부르게 먹고는 그 소식을 유득공에게 자랑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유득공도 가난했다. 그도 오래 굶었던 터라 그 이야기를 들은 동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팔아 같이 술을 먹었다. 

그래놓고는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맹자가 밥 지어주고 좌구생이 술 권해주었다’라고 하며 두 사람을 한없이 찬송했다는 이야기를 오랜 벗인 이서구에게 편지로 전했다. ᅌᅨᆺ날이나 지금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배고픔은 비슷했다. 학계에 자리잡지 못하면 제아무리 뛰어난 연구를 해도, 제아무리 독창적인 연구를 평생해도 굶어죽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왕께서 검서관이라는 자리를 내어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웠을까. 이덕무와 유득공이 검서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스승격이었던 연암 박지원은 ‘이제 굶어 죽지는 않겠다’라고 하며 안도의 글을 홍대용에게 편지로 전했다.

그렇게 열심히 정조의 학문적 세계를 돕던 이덕무가 과로사했다. 1793년 정월 25일 아침이었다. 쉰 하나라는 결코 길지 않은 책만 읽는 바보의 삶이 끝났다. 그의 문집인 『청장관전서』에는 모두 33책 71책의 엄청난 양의 글이 담겨 있다. 아쉬운 것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쓴 글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넘어서는 대부분 학술적 성격의 글이 중심을 이뤘고, 검서관으로 출사한 후에는 정조의 명으로 편찬한 서적들만 남았다.

정조는 1795년 4월 이덕무의 아들 이광규(李光葵)를 검서관에 특별히 차임하도록 했고, 규장각에 보관해둔 돈 500냥을 내려 주어 이덕무의 문집을 간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그런 학문적 내력이 있었기에 그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방대한 분량의 백과사전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덕무의 삶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예’라는 독특한 주제를 인문학적 관점으로 공부하는 필자에게 그의 삶은 그저 과거 속의 인물로 머물러 있지 않다. 아니 이 넘쳐나는 ‘인문학의 열풍’ 속에서 정작 인문학자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주변의 현실이 여전히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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