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내 지적도. 1911년에 작성된 지적원도 모습이다. 조선시대의 훼손되지 않은 모습을 담고 있다. 1200개의 필지와 학교 관청시설이 표기돼 있다. 붉은색은 당시까지 남아있는 관청시설이다. (자료=수원시)
화성내 지적도. 1911년에 작성된 지적원도 모습이다. 조선시대의 훼손되지 않은 모습을 담고 있다. 1200개의 필지와 학교 관청시설이 표기돼 있다. 붉은색은 당시까지 남아있는 관청시설이다. (자료=수원시)

새로이 이전한 수원에 시전(市廛 상점)을 설치하게 된 배경은 새 읍치의 취약한 도시여건과 경제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는 현륭원 조성과 신읍이 완료되고 다음해인 1790년 2월 8일 현륭원을 참배했다. 1790년 2월 11일, 정조는 신읍을 둘러본 후 경기관찰사와 수원부사에게 자신의 생각과 신읍의 활성화 방안을 다음과 같이 분부했다.

"이번 행차에 본부(本府)를 둘러보니, 새 고을의 관사(官舍)는 비록 틀이 잡혔으나 민가(民家)는 아직 두서가 없다. 그 가운데 이른바 지어놓은 집이라는 것은, 땅굴도 아니고 움막도 아니어서 달팽이 껍데기 같기도 하고 게딱지같기도 하다. 지금 짐작에는, 집들이 줄지어 서고 거리가 번창하여 엄연히 서울 근처의 큰 도회지가 되기란, 본래 짧은 시일에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만약 별도로 방안을 강구하여 사람들을 불러일으키어 모아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마음을 놓고 생각을 늦출 수 있겠는가. 새 고을의 소재지가 옛적 고을보다 낫게 되자면, 오직 조정에서 꾸려나가기에 달려 있으니, 묘당의 신하들은 십분 토의하여 빈대(賓對, 어전회의) 때에 아뢰도록 하라. …가장 좋은 방법은 토지의 구획을 정해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힘써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 또 그들로 하여금 힘껏 농사를 짓도록 해주는 외에 다시 직접 장사하여 이익을 보게 한다면, 장차 집집마다 면모가 달라지는 성과가 있게 될 것이다"

정조의 명을 받은 좌의정 채제공은 수원신읍 활성화 방안을 마련해 1790년 2월 19일 어전회의에서 보고 한다. 

"일전에 수원의 새 고을에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일에 대해 묘당으로 하여금 방안을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본부(本府, 수원)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원래 가난하게 살아오던 터이어서, 옛 고을의 1천여 호에 가까운 집들이 달팽이집처럼 생긴 오두막뿐입니다. 이번에 고을을 옮기고 나서도 만약 또 예전과 같다면, 거의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을 강제로 내몰아 큰 집을 억지로 지으라고 한다면, 비록 을러대고 권고해도 결코 해내지 못할 것으로 압니다. 길거리를 정연하고 빽빽하게 만드는 방법은, 전방(廛房, 가게)들을 따로 짓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선 서울의 부자 20, 30호를 모집하여 무이자로 1천 냥을 주어서, 새 고을에다가 집을 마주보도록 지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장사를 하여 이익을 보는 재미가 있게 한 다음, 몇 해를 기한으로 차차 나누어 갚게 한다면, 조정에도 별로 손해가 없고 새 고을에는 부락을 이루고 도회를 형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정조가 여러 대신들에게 물으니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채제공의 말이 옳다고 했다. 

1790년 5월 17일(정조14) 수원 부사 조심태가 신읍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해 정조께 보고했다. 

"본부의 새 고을 시정(市井)에 점포를 설치하는 일에 대하여 이미 대신들과 여러 재상들의 의견을 들었습니다. …본부는 삼남으로 통하는 요로이기는 하나 물산이 본디 적어서 비록 부호를 많이 모으고 점포를 설치하려 하더라도 갑자기 생각대로 되기는 어렵겠습니다. 반드시 본고장 백성들 중 살림밑천이 있고 장사물정을 아는 사람을 골라 읍 부근에 자리 잡고 살게 하면서 그 형편에 따라 관청으로부터 돈을 받아가지고 이익을 남기며 살아가게 하는 것이 좋은 대책이 될 것이라고 하니, 이 의견이야말로 한번 시도해 볼 만합니다. 어떤 관청을 막론하고 이자가 없는 돈 6만 냥을 떼어내 고을 안에서 부자라고 이름난 사람 중에 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어 해마다 그 이익 나는 것을 거두게 하되, 3년을 기한으로 정하고 본전과 함께 거두어들인다면 백성들을 모집하고 산업을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 아마 하나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대신에게 가서 의견을 들어보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채제공이 말하기를, ‘운영에 매우 조리가 있으니 마땅히 진술한 대로 시행해야 합니다’하니, 균역청의 돈으로 떼어주도록 명하였다.” 

시전의 설치는 1791년(정조15) 1월 10일자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교시를 내려 새로이 지은 수원 신읍의 공해(公廨, 관청건물)와 시전 기둥머리에 각기 이름을 쓴 소판(小版, 작은 간판)을 걸어 원행 때 편하게 주람(周覽, 돌아다니며 살펴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정을 기록한 1792년에 작성된 「수원부읍지」의 기사에 따르면 시전을 조성하기 위해 장사를 좀 아는 사람들에게 1만5000냥을 대여하여 시전을 개설했다고 적고 있다. 이에 따라 입색전(立色廛, 비단전)은 관문밖 도로 북쪽, 어물전(魚物廛, 생선가게)은 입색전과 방으로 통하는 곳에 위치, 목포전(木布廛 백목, 모시전)은 관문밖 도로 남측, 미곡전(米穀廛 백미, 남초, 누룩전)은 관문밖 도로 동쪽, 유철전(鍮鐵廛, 유기전)은 북리 부근, 관곽전(棺槨廛, 관취급전)은 미곡전과 통하는 곳에, 지혜전(紙鞋廛, 종이와 신전)은 관곽전 아래, 염급상전(鹽及床廛, 소금과 상을 취급)을 두는등 8개의 전으로 설치했다. 

그러나 시전이 설치된 초창기 상황을 살펴보면 정조의 유시 내용처럼 정부의 지원을 필요로 할 정도로 취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1790년 10월 24일자 「비변사등록」 기사에 의하면 비변사에서 식목에 수고한 수원 전민(廛民, 상점주)의 노고를 갚아주는 방편으로 평양감영에서 보관하고 있는 묵은 목면을 허급(許給, 공급을 허락하다)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이 1만 그루의 나무를 자원해서 심자 이들의 어려운 여건을 감안해 보상해 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평양에 오래 쌓아두어 부패하고 상해가던 목면 1000여동 중 300동에 대한 판매권을 이들에게 줌으로써 이득을 주고자 함이었다. 그해 12월 14일 채제공은 평양에서 나온 필단(疋緞, 필로된 비단) 500필을 수원의 입색전에 허매(許賣)하도록 건의했다.

이러한 조처는 기존의 상거래를 위축하는 역기능도 나타났다. 당시 사정을 채제공은 수원시전은 도고(都庫, 물건을 도거리로 맡아서 파는 일)의 폐해가 없는 물품이 없었다고 했다. 심지어 미곡(米穀, 쌀)까지 도집(都執)행위가 발생했다. 이후 난전권(亂廛權, 독점상행위)을 폐하는 신해통공(辛亥通貢, 신해년 난전권 폐지)조치가 내려져 이러한 현상은 차츰 사라지게 됐다.

정조는 1795년 원행(혜경궁홍씨 회갑연)때 남은 돈으로 정리곡(整理穀)에 대한 운영방침을 정했다. 화성경영에서 비롯된 잉여곡물이 전국에 고루 배분될 수 있도록 하고 이 돈을 화성경영 경비로 활용토록 했다. 또한 화성건설과 병행하여 만석거와 축만제, 만년제, 남제 등을 축조하고 둔전을 조성하자 쌀 생산이 증대됐다. 이러한 연유로 수원은 쌀과 서해안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당시 수원 시전에서 거래되는 가장 활발했던 품목이 됐다.

1917년 화성내 지도. 북수리 팔부자거리에 성내시장이, 남쪽 남암문앞에 시장이 표기돼 있다. 성 밖 시장이다. (자료=수원시)
1917년 화성내 지도. 북수리 팔부자거리에 성내시장이, 남쪽 남암문앞에 시장이 표기돼 있다. 성 밖 시장이다. (자료=수원시)

1797년(정조21)에는 화성 시전의 안정된 발전을 위해 부유한 자 20인으로 계를 조직, 화성으로 이주 시켜 집을 짓고 살아가게 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이에 따른 조건을 제시했다. 이들에게 대로변에 남북으로 기와집을 짓게 하기 위해 목재 구입과 관련한 편의를 제공하고 이들에게 지급한 융자금은 매년 1000냥씩 반분하여 획급(劃給, 나누어주다) 하는 등 시전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도록 지원했다. 

그러나 20호를 유치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듯했다. 북수동(옛 보시동)에 팔부자거리가 있음을 볼 때 최종 8호가 유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원 시전의 발전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도 있었겠으나 신읍 조성과 함께 시흥로의 건설과 삼남길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편리성도 크게 작용했다. 

수원지방 장시분포도. 1860년대 수원지방 5일장이 표시된 지도이다. 현재까지 오산장과 안중장은 유지되고 있다. (자료=수원시사)
수원지방 장시분포도. 1860년대 수원지방 5일장이 표시된 지도이다. 현재까지 오산장과 안중장은 유지되고 있다. (자료=수원시사)

수원에는 북문외장(北門外場)과 남문외장(南門外場)이 개설된 것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개의 장시가 개설돼 있었다. 인근에서 개설된 장시는 오산장(4·9)·안중장(2·7)·오매장(1·6)·석현장(2·7)·사슬곳장(4·9)·팔탄장(5·10)·세람장(1·6) 등이 있었다. 장이 열리는 날짜는 인접한 장들과 겹치지 않도록 하였기에 상인들이 순회할 수 있어 활성화에 도움이 됐다.

또한 수원은 화성축성 때 많은 우마가 사용됨에 따라 우시장의 설치는 당연했다. 지리적인 여건으로 수원의 우시장은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우시장으로 형성됐다. 

이러한 여건을 가진 수원의 장시는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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