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당시 수원의 주요 시장분포도, 북수동의 가축시장, 성밖의 영동시장, 매산시장이 표기되어있다. (자료=수원시사)
1955년 당시 수원의 주요 시장분포도, 북수동의 가축시장, 성밖의 영동시장, 매산시장이 표기되어있다. (자료=수원시사)

우리나라에서는 시장을 ‘저자’, ‘장시(場市)’, ‘장마당’ 등으로 불렀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시장을 “여러 가지 상품을 사고 파는 일정한 장소”, “상품으로서의 재화와 서비스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추상적인 영역”으로 정의한다. 일반적으로 시장은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재래시장을 들 수 있다. 재래시장은 사전적으로 “예전부터 있어 오던 시장을 백화점 따위의 물건 판매 장소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정의 된다.

근래에 와서 재래시장이라는 명칭 대신 전통시장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재래시장과 달리 전통시장이라는 용어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없다. 전통시장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이 되어서 기존의 재래시장이라는 용어가 ‘낙후되었다’는 이미지가 강해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됨에 따라 중소기업청이 상인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사용하게 됐다.

1956년 수원시가 간행한 '시세일람(市勢一覽)'에 따르면 1955년 말 기준으로 4개의 시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중에 북수동에서 개설된 가축시장을 제외한 생필품시장은 영동시장, 매산시장, 남수동의 신탄시장(薪炭市場)이 있었다. 영동시장은 346개 점포, 매산시장은 154개의 점포가 있었다.

신탄시장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당시 '시세일람'에서는 이 시장이 1949년 6월 10일에 설립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점포수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땔감을 사고파는 전문시장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신탄시장은 땔감을 팔려는 사람과 그것을 사려는 사람이 특정 시간대를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반짝시장 혹은 번개시장 형태로 개설됐기 때문이다.

1961년 말을 기준으로 작성된 수원시의 '제2회 통계연보'에 신탄시장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후 통계연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제3공화국 수립 이후 전국적으로 산림녹화가 대대적으로 진행되고 입산금지조치가 강력하게 시행되면서 더 이상 나무를 판매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연탄보급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수원의 현존하는 시장 중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간직한 곳은 영동시장이다. 현재 포목, 한복 등 의류와 원단이 특화된 시장이다. 1956년 '시세일람'에 따르면 1919년 1월17일 설립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장은 1790년 2월 11일 정조가 신읍 활성화 방안을 지시하여 시작된 232년의 역사를 가진 시장이다.

영동시장은 수원시에서 상인조직이 가장 먼저 설립된 시장이기도 했다. 1953년 3월 30일에 영동시장번영회가 설립되었다. 번영회의 구성은 임원 21명, 직원 4명, 조합원 370명이었다. 영동시장은 한국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수복 후인 1951년 4월 4일 복구됐다. 그 즈음 시장 내에 별도로 미곡(쌀)시장이 설치됐다.

당시에는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다양한 사업이 진행됐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수원시 최초로 도시계획이 수립됐다. 이때 수원구도심인 남수동, 팔달동, 영동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결정됐는데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전쟁 직후 영동시장번영회가 팔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 상가를 정리하고 점포를 신축해 분양하려 했다. 그런데 상가분양과 관련, 영동시장 일대에서 노점을 하던 전쟁피난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이에 대해 1951년 10월 17일 '자유일보'에는 "… 영동시장번영회에서는 전화(戰火)로 파괴된 터에 무질서하게 버려진 상가를 정리하여 165점포를 신축하기로 되었는바 현존 노점피난상인 김영범 등 99명은 지난 4일 도, 시, 경찰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여 반대의사를 표시하며 그 귀추가 주목된다는데, 이에 의하면 한 점포 공사비는 70~80만원에 달하여 결국 차등 점포가 유력상인인 원주민에게 돌아가고 노점상인은 실직되고 만다는 것이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1954년 8월13일 팔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서 전쟁피해 복구사업은 시작됐다.

1950년대 말 영동시장 주변의 모습. 여러 차례 화재 이후 영동시장과 수원천변 시장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사진=수원시사)
1950년대 말 영동시장 주변의 모습. 여러 차례 화재 이후 영동시장과 수원천변 시장이 자리 잡은 모습이다. (사진=수원시사)

한편 예나 지금이나 전통시장은 화재에 취약한 실정이다. 영동시장도 오랜 역사만큼 수차례 화마를 입었다. 특히 목조건물이던 때에는 화재에 더욱 취약했다.
신문기사를 보면 영동시장은 1952년 11월 27일 새벽에 화장품 상점에서 촛불 부주의로 시작된 화재로 점포 25개 동이 흔적도 없이 타버리는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이 화재가 일어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더 큰 화재를 입었다. 전체 점포의 절반이 이상이 불에 타 버린 것이다. 1953년 1월 19일에 일어난 화재로 시 소유건물 294동과 개인 소유건물 6동이 전소됐다. 그 피해액은 당시 돈으로 59억1624만원에 달했다. 이 화재로 전소된 건물들은 운크라(UNKRA)의 자재 지원을 받아서 1954년 1월 26일 시멘트 블록조의 2층 건물을 지어 준공했다.
그 후로도 영동시장은 1957년 2월 4일, 1970년 3월 21일 크고 작은 화재를 겪었다.

1950년대 매산시장 모습. (사진=수원시사)
1950년대 매산시장 모습. (사진=수원시사)

특히 1953년 1월에 일어난 영동시장의 화재로 수원시의 세수가 4분의 1이나 감소하면서 재정난에 봉착했다. 당시 수원시는 매산시장 점포들을 매수하여 직영하려고 했으나 세수감소로 무산되어 매산시장은 사설시장으로 남게 됐다. 매산시장은 수원에서 영동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설치된 상설시장이다.

1956년 '시세일람'에 의하면 매산시장의 설립은 1949년 2월 5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1948년 12월 14일자 동아일보에는 '매산시장 19일 개시(수원)’라는 기사에 "매산시장 상인들이 기성회를 조직하고 1000여만원을 걷어 현대식 점포 113호를 신축하여 12월 6일에 완성하였고, 그달 19일부터 상설지장으로 개시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는 행정절차상 일정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전쟁 직후의 혼란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55년에는 제1수원천시장과 1956년 제2수원천시장이 개설됐다. 제1수원천시장은 수원시 사업보회회가 운영했고, 제2수원천시장은 대한군인유족회 경기지부가 관리했다. 당시 수원에는 1893개의 소매상점에서 2099명이 종사했다.

백화점 입주 응모공고, 동아일보 1957년 12월 20일자 광고. (자료=동아일보)
백화점 입주 응모공고, 동아일보 1957년 12월 20일자 광고. (자료=동아일보)

수원시에도 1950년대에 백화점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1957년 12월 20일자에는 ‘백화점입주응모공고’광고가 실렸다.
"수원의 심장인 영동시장의 중심지에 현대식 철근콘크리트 건물(330평) 최신장비로서 좌와 여히 개점코저 하오니 물실기회(勿失機會) 하시고 다수응모 하심을 앙망(仰望)하오며 자(慈)에 공고함"

1970년대 시민백화점 모습. (사진=수원시사)
1970년대 시민백화점 모습. (사진=수원시사)

이는 1957년 10월에 문을 연 시민백화점으로 추정된다. 시민백화점은 1964년 4월에 소유권이 수원시청으로 이전되었다가 1969년 5월 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총회를 개최하고 그해 10월에 ㈜시민백화점으로 설립 등기를 마쳤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사설시장으로 개설허가를 취득했다. 시민백화점은 이후 여러 차례 변화를 거쳐 1998년에는 대규모 소매점(백화점) 개설 면허증을 반납하고 2003년에는 시설개선을 거쳐 시민상가시장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경제개발에 매진했다. '구법령정리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하여 일제강점기 이래 유지되던 '시장규칙'이 폐지되고 이를 대체한 '시장법'이 1961년 8월 31일 제정됨에 따라 유통산업 발전의 계기가 됐다.

또한 1963년 경기도청의 수원 유치와 산업시설 유치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도청소재지로서의 활성화 정책에 힘입어 수원의 상권은 활황기를 맞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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