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남창동사무소로 활용된 옛 양성관 가옥. (사진=수원시)
1960년대 남창동사무소로 활용된 옛 양성관 가옥. (사진=수원시)

조선은 전통사회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엄격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집에 대한 제반사항을 법으로 마련했다. 조선의 주거 정책은 신분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조선시대 가대제도(家垈制度, 대지와 건물제도)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도성(都城)내의 토지정책은 기본적으로 국유제를 바탕으로 했다. 토지는 국가소유로 했고 집은 사유를 인정했다. 집터 사용료로 가기세(家基稅)를 징수했다. 토지사용 희망자는 한성부에 신청해 사용했다. 한성부는 차용 후 만2년이 넘도록 건물을 세우지 않거나 공지로 방치할 경우 땅을 회수해 타인에게 대여했다. 

태조4년, 대지분급 기준. (자료=태조실록)
(자료=태조실록)

한양천도 후 태조4년에 이르러 행정조직이 비대해지고 한양에 상주하는 관리수가 증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협소한 도성 내에서 충분한 대지를 분급하기 어려워지자 신분과 품계에 따라 주택의 대지를 분급하는 제도를 마련했다. 정1품 35부(4929.05㎡)로 하고 이하 품계에 따라 5부씩 내려서 주었는데 6품이 10부였으며 서인(庶人)은 2부로 정해 운영했다.

85-3, 경국대전, 대지분급 기준. (자료=경국대전)
(자료=경국대전)

그러나 도성 안에서 나누어 줄만한 집터는 모두 합해 500결(結, 조선후기 1결을 10,000㎡로 규정)정도여서 부족한 실정이었다. 그 후 예종 원년(1469)에 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 급조가지조(給造家地條, 가옥 대지의 급여)에는 대군 · 공주는 30부, 왕자군 · 옹주는 25부, 1품과 2품의 관리는 15부, 3품과 4품의 관리는 10부, 5품과 6품의 관리는 8부, 7품 이하의 관리와 음덕을 입은 자손은 4부, 서인은 종전과 같이 2부로 했다. 

이러한 제도는 세력 있는 계층이 택지를 과점하는 것을 막고자함이다. 택지 면적이 넓어질 경우 대규모의 주택을 건설하게 되며, 대규모의 집을 지을 경우 목재 등 건축자재가 증가하고 수송하는 노동력의 증가로 백성에게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금을 내지 않지 위해 도로에 임시로 가건물을 짓는 사람도 있었다. 

세종은 13년(1431) 정월에 예조(禮曹)에 하교했다. 
“가사제도(家舍制度)가 없어 백성들의 집이 귀족의 집을 지나치고 귀족의 집이 궁궐을 능가하는 정도로 치장하려 다투니, 상하가 넘나들어 참으로 외람되다. 지금 부터는 임금의 친형제나 왕자, 공주의 집은 50칸, 대군(大君)의 집은 거기에 10칸을 더하고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백성의 집은 10칸을 넘지 않게 하라. 주춧돌 말고는 다듬은 돌을 쓰지 말고 화공(花拱,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의 앞머리를 새김질하여 치장한 모습) 구성하지 말며, 진채(眞彩, 진하게 쓰는 불투명한 원색적인 채색)로 단청하지도 못하게 하여 검약을 힘써 지키도록 하라.”

즉 대지의 제한보다는 오히려 가옥의 규모를 칸수로 제한함으로써 물질적인 자원의 억제와 신분상의 질서유지를 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뒤에 경국대전에 기록됨으로써 조선시대 500년간 하나의 건축 법규로써 지켜지게 됐다. 

세종31년의 건축규제. (자료=세종실록)
세종31년의 건축규제. (자료=세종실록)

이후 조선시대엔 집의 크기를 일반적으로 칸수로 정했다. 이 칸(間)은 두 기둥사이의 길이 또는 네 개의 기둥 안의 면적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칸의 개념은 일정치 않아서 6척, 7척, 8척, 9척, 12척 정도도 모두 1칸으로 보았다. 따라서 1칸으로 표현되는 면적의 크기는 융통성이 많았다. 이러한 모순을 없애기 위해 칸수는 물론 각 부재(部材)의 상한선을 세종22년(1440)과 31년(1449)에 세칙으로 마련했다. 

이때 첨가된 내용은 보나 도리의 길이, 기둥의 높이, 전 · 후 퇴(退)의 크기, 행랑의 크기 등이 3차 개정에 들어가 실제적으로 가옥의 크기를 제한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경제가 안정되고 건국 초기의 긴장이 풀리자 사치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따라서 성종 9년(1478)에 다시 공조에서 제한령 개정을 추진했다. 이러한 법제정의 변화 내용을 보면 첫째로 면적을 나타내는 칸수의 제한은 초기(세종13년)부터 동일하게 나타났다. 둘째로 기둥높이의 척수는 초기에서 후기로 올수록 조금씩 증가했다. 예컨대 대군가(大君家)에서 세종 22년 때보다 세종 31년에 약 1척 정도 증가했다. 서인(庶人)에서도 세종 22년에 기둥높이 7척이 세종 31년에 10척 5촌, 성종 9년에는 11척으로 되어 현저한 증가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옥의 칸수에 따른 그 실제 적 크기를 놓고 볼 때는 오히려 매우 검소했던 기준으로 볼 수 있다. 서인의 경우 10칸은 거실 공간뿐만 아니라 광 등의 헛간채도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령은 임란 이후부터는 유명무실해지기 시작했다.  

성종은 계성군(성종의 서자)의 집을 지어주면서 법령을 어겼다. 이후 왕자, 공주의 집들은 크고 화려하게 지어졌다. 그럼에도 역대 임금들은 규정을 지킬 것을 수시로 명령을 내렸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기강확립에 몰두하던 시기 법을 어긴 집의 색출을 한성부에 지시했다. 이 때 법을 어겨 적발된 집은 무려 280여 채가 됐다고 한다.

이렇게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은 왕자와 공주 뿐 만 아니라 사대부에서 서인에 이르기까지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임란 후 인조 3년(1625)에 지은 정명공주가(貞明公主家)는 무려 170여 칸이나 되는 대규모였다. 이렇게 전란을 치룬 후 국가경제가 어려운 여건에서도 일부 귀족들의 가옥규모는 오히려 커졌고 가사(家舍)제한의 법제는 유명무실해졌음을 알 수 있다.

제도 불이행은 사회질서와 나라의 법적차원에서는 문제가 되겠지만 법규가 최대치보다는 최소치에 의거하여 이 기준으로는 집이 생활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기가 곤란하지 않았을까 한다. 조선조 집들은 후기로 내려오면서 윤리나 신분보다도 경제력에 의해 사회가 운영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주거생활의 다양화 추세는 가속화된다. 

한편 연산군 때 한양 남산에 9만9999칸의 초호화주택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울에 오는 사람은 이 집을 구경 하러 왔다가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판서 홍귀달이 지은 허백당(虛白堂)은 단칸초막이었기 때문이다. 단칸방에서도 9만9999칸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그의 주거 철학을 흠모하는 선비들의 입을 통해 와전된 것이라고 했다.

1960년대 양성관 가옥 부근 현황도.  (자료=수원시)
1960년대 양성관 가옥 부근 현황도.  (자료=수원시)

수원에서도 99칸의 집이 있었다. 1960년대 남창동의 양성관 가옥이 한국민속촌으로 이축됐다. 없애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수원의 여건이 허락된다면 원래 자리에 재축을 하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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