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도보통지』 장창 중 틈홍문세(闖鴻門勢)에 대한 그림과 설명부분이다. 전통시대 무예서는 다양한 비유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상상의 선은 늘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만약 그 선을 잘못 넘으면 돌아오기가 어렵다.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너면...
『무예도보통지』 장창 중 틈홍문세(闖鴻門勢)에 대한 그림과 설명부분이다. 전통시대 무예서는 다양한 비유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상상의 선은 늘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만약 그 선을 잘못 넘으면 돌아오기가 어렵다. 루비콘(Rubicon) 강을 건너면...

- 무예 자세의 비유법과 옛 이야기

 『무예도보통지』 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무예가 장창(長槍)이다. 전장 길이가 1장 5척으로 요즘으로 환산하면 약 4m 60cm에 달하는 매우 긴 창이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긴 창을 혼자 사용하는가?"라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답은 혼자 사용하는 무기다. 같은 시대의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5m가 넘는 장창도 자주 활용되었다. 

 특히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보병들이 집단 장창진을 펼치면 말 그대로 거대한 ‘창숲’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맹렬하게 달려드는 적의 기마병을 상대로 전면을 향해 동시에 겨눠서 흔들면 마치 고슴도치가 바늘을 펼치는 모양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전통시대에 보병의 일정숫자는 반드시 장창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창의 다양한 움직임 중 ‘틈홍문세(闖鴻門勢)’라는 자세명칭이 있다. 이 자세는 내렸던 창두(槍頭)를 다시 세우며 뒤로 한걸음 물러서 적을 겨냥하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홍문(鴻門)은 『초한지(楚漢志)』에 등장하는 한고조인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만났던 지명의 이름이다. 현재 중국의 섬서성(陝西省) 동현(潼縣)의 동쪽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자세 명칭이 ‘홍문’을 ‘틈(闖)’하는 움직임이다. 틈(闖)은 엿보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문:문(門)자 사이에 말:마(馬)자가 끼어 있는 회의자다. 그래서 빠르게 달리던 말이 대문에서부터 돌진하여 나와 지나간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원래 본뜻은 ‘앞으로 돌진하다’이며, ‘용감하게 나아가다’, ‘거리낄 것이 없다’라는 뜻을 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고사를 이해해야만 자세의 움직임을 좀 더 쉽게 표현할 수 있다. 고사를 보면 이렇다. 기원전 207년 12월에 진나라 말기 초한쟁패기 직전에 진나라의 수도 함양 근처의 홍문(鴻門) 이라는 곳에서 자웅을 겨루던 유방과 항우가 만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를 홍문연(鴻門宴) 혹은 홍문의 회(鴻門之會:홍문지회)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홍문에서 주둔하던 항우의 군영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그 날 유방이 그곳에 손님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그런데 항우의 신하였던 범증은 그곳에서 유방을 죽이고자 계획했다. 그때 자객으로 등장하게 된 사람이 항우의 친척 동생인 ‘항장(項莊)’이다. 그의 칼 솜씨가 일품이었다. 범증이 세운 계획은 항장이 술을 한잔 올리고, 그 술잔이 비면 검무(劍舞)를 출 것을 청하고 기회를 봐서 유방의 목을 쳐버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술자리가 무르익고 항장이 유방에게 이렇게 말을 건넨다.  "이런 군영의 술자리에 따로 즐길 만한 것이 없으니 제가 검무를 춰서 흥을 돋궈볼까 합니다(軍中無以爲樂 請以劍舞) ." 유방은 제 목이 날아갈 줄도 모르고, 흔쾌히 승낙하고 항장은 칼을 뽑아 들고 멋지게 칼 솜씨를 뽐냈다. 때로는 성난 비 바람처럼, 때로는 고요한 안개처럼 서서히 유방의 목에 다가갔다. 그런데 그 낌새를 눈치챘던 유방의 측근 인사인 항백이 슬그머니 끼어들어 칼이 날아오는 순간 교묘하게 방해했다.

 한 번, 두 번... 칼이 유방의 목에 다가갈 때마다 술판의 분위기는 점점 얼어붙었다. 이제 유방도 상황을 이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순간 유방의 맹장(猛將) 번쾌가 번개처럼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군인 유방을 지키는 듯 하며 칼을 뽑아 들고 춤을 췄다. 항우는 그 패기가 마음에 들어 번쾌를 치켜 세우며 한 술동이를 내려주었다. 그때 번쾌는 술 한동이를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원샷!을 해버린 것이다. 항우는 번쾌의 장쾌한 분위기에 취해 그대로 유방을 놓아 주라고 명령해버렸다. 항우의 측근들은 안타까웠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훗날 그날 미리 유방의 목을 베어 버렸으면, 천하의 ‘항우장사’가 그렇게 속절없이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에서 번쾌가 자신의 주군인 유방을 지키기 위해 겹겹이 둘러쳐진 홍문의 문을 박차고 난입하고, 바로 유방을 보호하는 모습이 그 자세에 담긴 것이다. 깊숙하게 상대를 몰아 붙여 공격한 이후 한 걸음 물러나며 긴 장창을 상대의 목을 향해 견고하게 겨누는 자세다. 그 철옹성과 같은 문의 틈을 박차고 돌진했다가 방어를 강화하며 물러서는 것이다. 장창의 후보(後譜) 중 청룡헌조세(靑龍獻爪勢)-엄검세((馬奄劍勢)-틈홍문세(闖鴻門勢)가 바로 이런 흐름으로 연결된 것이다. 

 홍문의 문을 청룡이 발톱을 세우듯 돌격하며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가, 한 걸음 물러가며 주군을 향한 적의 칼날을 가리고, 또 한 걸음 물러서며 주군을 보호하며 창날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자세인 야차탐해세(夜叉探海勢)로 장창후보는 끝맺음을 한다.

- 쌍검의 항장기무세(項莊起舞勢)와 한고환패상세(漢高還霸上勢)

 앞에 설명한 홍문연의 이야기는  『무예도보통지』 의 쌍검의 마지막 자세인 항장기무세(項莊起舞勢)에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 자세의 이름처럼 ‘항장’이 검무를 시작하는 자세다. 그런데 그 시작은 유방의 목을 치는 검무의 마지막 장면을 상정했기에 쌍검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다. 쌍검의 연결된 자세로 설명하면 이렇다.

 쌍검의 마지막 자세는 지조염익세(鷙鳥斂翼勢)-장검수광세(藏劍收光勢)-항장기무세(項莊起舞勢)로 마무리된다. 사나운 매와 같은 맹조가 날개를 거두듯 숨을 고르고 있다가(지조염익), 칼을 감추고 빛을 거두듯 빠르게 양 손의 칼을 사선으로 교차하여 베어나갔다가(장검수광), 마지막에 적 수장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듯, 왼편 칼로 오른편을 한번 씻어 베는 ‘항장의 검무’가 펼쳐지는 것이다(항장기무). 

 마상쌍검에서도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일화가 담긴 자세가 있다. 한고환패상세(漢高還霸上勢)가 그것이다. 말을 힘차게 달리며 양손의 칼을 교차로 휘둘러 베어 오른편 겨드랑이 사이에 왼편의 칼을 끼우는 자세다. 그 이름처럼 유방이 패상(霸上)에 있는 자신의 군영으로 돌아 오는 자세를 말한다. 그 고사를 살펴보면 이렇다.

 유방이 항우와 패권을 다툴 때, 유방의 군대가 진 나라의 수도인 함양에 먼저 들어가서 그 화려한 모습에 반해 그대로 눌러 살고 싶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는 천하제패를 야심차게 준비했던 항우가 서슬퍼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보물들, 아름다운 여인들, 든든한 성벽... 마치 유방을 위해 그 모든 것이 준비된 것처럼 보였기에 순간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유방이 그 모습에 취해 함양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다만 몇 달도 지나지 못해서 항우장사의 칼에 몸이 두동강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희대의 책략가 장량(張良)이 유방 곁에 있었다. 실은 홍문연에서도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번쾌를 출동시킨 장본인이 장량이었다. 먼저 번쾌가 궁궐 밖으로 나가 군영을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유방은 화려한 궁궐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때 장량이 나섰다. 다시 군사요충지인 패상(霸上)의 군영에 돌아가 군사들에게 검소하고 강인한 모습을 보여야만 군주의 모범이 될 것이다라고 직언했다. 그때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 말을 들은 유방은 반성했다. 그리고 다시 화려한 함양의 궁궐을 뒤로하고, 흙먼지 날리는 패상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그를 따르던 군사들은 유방의 검소함에 진심으로 반응했다. 그 진심을 가지고 전투력이 몇 배나 강했던 항우의 군대를 몰락시켰고, 훗날 진나라에 이어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한 한나라의 제1대 황제에 올랐다. 충신의 말을 듣지 않은 서초패왕을 꿈꿨던 항우는 목숨을 잃었고, 충신의 말을 따른 유약했던 유방은 천하를 제패했다. 

 한고환패상세(漢高還霸上勢)에는 그런 의미가 담긴 것이다. 아쉬워도 되돌아가야만 하는 움직임. 적을 향해 내려치고 싶은 칼이지만, 반드시 옆구리에 한 칼을 끼워야만 나머지 칼이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하여 전통시대 만들어진 무예서의 자세 이름은 다양한 비유법과 역사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해당 자세를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해야 표현이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과도하게 의미를 확대해석한다면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 만다. 선인들이 해당 무예 자세를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등을 조심스레 찾아 가는 것이 무예 공부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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