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사노 박언지(延安私奴 朴彦之).내노 전막동(內奴 田莫同).사노 차억룡(私奴 車億龍).내노 한귀학(內奴 韓貴鶴).내노 김수연(內奴 金守延).배천사노 정희동(白川私奴 鄭希同).연안사노 유석을(延安私奴 兪石乙).연안사노 무금(延安私奴 無金).내노 김만수(內奴 金萬守).배천내노 이응춘(白川內奴 李應春).연안사노 김언록(延安私奴 金彦祿).평산사노 허물단(平山私奴 許勿丹).연안내노 이언충(延安內奴 李彦忠).관노 순이(官奴順伊).관노 대언오십동생이(官奴 代言五十同生伊).관노 명구지(官奴命仇知).관노 억수(官奴億守). 관노 말추(官奴 唜秋).피장 덕손(皮匠 德孫).야장 개동(冶匠 介同).사노 대춘(私奴 大春).강음사노 춘이(江陰私奴 春伊).연안사노 억환(延安私奴 億環).연안사노 중남(延安私奴 仲男).연안사노 면향(延安私奴 免鄕).연안사노 차득륜(延安私奴   車得輪).연안사노 이충남(延安私奴 李忠男).사노 김천양(私奴 金千良).경사노 이귀인(京寺奴 李貴仁).조노 최개손(曺奴 崔介孫).사노 홍사충(私奴 洪士忠)]

​임진왜란 초기 연안성싸움에서 왜적과 싸워 감동적인 승리를 거뒀던 노비들이다.

이들 자랑스런 이름은 연안대첩을 이끌었던 의병장이자  황해도 초토사(招討使)였던 이정암(廷암(香+奄).1541-1600)의 문집인 《사류재집(四留齋集)》의 <해서결의록(海西結義錄)> '아병(牙兵)'항목에 실려 있다.

아병은 조선시대 대장의 휘하에서 중요한 방위 임무를 맡았던 병사를 말한다.

이들 노비는 앞장서서 싸우면서 대장의 신변을 지키는 경호대 역할을 하는가 하면, 적군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여기저기 긴요한 곳에 연락을 취하는 전령도 도맡아했다.

어디 이들뿐이랴. 이 싸움에 참여했던 조선의 천민(賤民)들은 남여를 불문하고 부지기수였다. 남정네들은 칼이 아니면 몽둥이와 횃불을 들었고, 여인네들은 밥짓고 돌나르며 쉼없이 뜨거운 물을 끓여댔다.

양반과 상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분충토적(奮忠討賊.충성을 떨쳐일으켜 적을 토벌함)의 기치 아래 귀천(貴賤)이 따로없었다.

왜적이 조선 강토를 맘껏 유린하던 1592년(선조25년) 10월초(이하 양력). 이 땅을 침범한 지 4개월 여가 지난 때였다. 임금 선조는 의주(義州)행재소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이 이끄는 1만명 가까운 왜적들은 연안성으로 밀려들었다.

의병장 이정암을 중심으로 한 연안성 의병들은 이미 죽기를 각오한 지 오래였다. 이 성마저 빼앗기면 해서(海西)지방도 모조리 적의 수중에 떨어질 판이었다.

싸움은 참으로 격렬했다. 이공의 행장(行狀)에는 당시의 전투장면이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다음은 그 중요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왜적들은 밤낮으로 고함을 지르며 돌진해왔다. 포성으로 지축이 흔들리고 조총탄이 비오듯 쏟아졌다. 하늘은 온통 독한 연기로 새카맣게 뒤덮였다. 천지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조선의병들은 용감하고 지혜로웠다. 밤이 깊어지면서 왜적의 기세는 다소 사그라들었다.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 대장은 세차게 뿔피리를 불게 했다. 이 소리를 들은 성안 백성들은 미리 약속한대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횃불을 환히 밝히고 함성을 질러 적을 혼란속에 빠트렸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활을 쏘는 등 기습공격을 가해 적들의 끊임없는 파상공세를 저지하기도 했다.

적이 공중누각을 세워 성을 굽어보며 대포를 쏘면  큰 화승총으로 쏘아 부숴버렸다. 적이 또 큰 사다리를 성채에 걸치고 개미떼같이 붙어 기어오르자 큰 돌멩이와 불덩어리를 던지고 끓는 물을 쏟아부으며 사투(死鬪)를 벌였다. 이 때 거센 동풍이 불어준 것은 천운(天運)이었다. 불붙은 사다리는 맥없이 무너져내렸고 개미떼같이 달라붙던 왜군들도 가을 낙엽처럼 성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천운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밤낮으로 계속되는 싸움에 지쳐 군사들이 한밤중 기진맥진해 있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귀신불'로 불리는 영롱한 불꽃들이 날아들어 성안을 대낮같이 밝혔다. 

왜적들은 이를 보고 놀라 "하늘이 조선군을 돕고 있다"며 공포에 질려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연안지(延安誌)》에 실린 <임진유사(壬辰遺事)>에는 또하나의 신기한 이야기가 전한다.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피로가 누적되면서 병사들의 사기는 떨어져가고 있었다. 밤에 한 여인이 북문 밖에 와서 수비병을 부르며 '내가 줄 게 있는데 급히 받으라'고 했다. 그 병사가 적의 속임수로 생각해 듣고도 응하지 않자, 여인은 병사를 계속 불러댔다. 병사가 곁눈질로 쳐다보니 그녀는 긴 화살들을 한아름 안고 서 있었다. 용모도 단아하고 목소리도 낭랑했다. 이에 적이 하는 짓이 아님을 알고 성모퉁이에 몸을 의지한 채 굽어보며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자신은 해주 기생으로 성안에 돌과 화살이 다 떨어졌을 것으로 생각돼 성 수비에 도움이 될 긴 화살 16촉을 가져왔으니 의심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병사가 화살을 가져온 그녀의 뜻이 가상해 "성안으로 들어오고 싶으면 몸수색을 해야 한다"고 하자 사양한 채 즉시 발길을 돌렸다. 

너댓 발짝을 가다가 몸을 돌려 나지막히 말하기를, "며칠 안돼 적들이 물러갈테니 그대들은 부디 성벽을 견고히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았다.

연안성은 다시 평정을 되찾고 용기백배했다.

이래저래 놀란 왜군은 더이상 견디지못하고 성밖에 쌓인 산더미같은 시체들을 불사르고 야반도주했다.

이 해 10월3일부터 6일까지 나흘 밤낮 계속된 전투는 연안성 의병들의 승리로 끝났다.

관군의 도움없이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스스로 모여든 백성들이 싸워 이긴 승전보였다. 이 승리로 선조가 있는 의주(義州)행재소까지 간당간당하던 서해수송로가 유지될 수 있었다.

역사는 이를 연안대첩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아마도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왕이나 대통령은 없다"고 일갈한 '가황(歌皇)' 나훈아선생의 '못다한 말'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또다른 하나는 오늘 이 나라 위정자들을 향해 "제발 정신 좀 똑바로 차리라"는 호통이 아니었을까. 

그저  혼자서 추측해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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