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양 순교성지에 다녀왔다.
버스 시간이 남아 조성진 화성연구회 이사가 운영하는 팔달문 안 카페 가빈 카페와 갤러리에서 ‘김세환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때마침 연락이 닿은 이광호 시인과 함께.
우리는 조성진을 ‘김세환 선생의 후생’이라고 칭한다. 조 이사가 운영하는 가빈갤러리와 카페가 당시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 242번지(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792)로서 선생이 태어나고 생활했다는 인연으로 사비를 들여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전시회와 역사 콘서트를 진행하고 있다. 가빈갤러리 앞 인도엔 ‘김세환 집터’라는 안내판도 설치돼 있다.
팔달문에서 400번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걸려 남양순교성지에 도착했다.
때마침 점심 때여서 읍내로 들어가 식당을 찾아봤다. 간판이 꼬부랑글씨로 되어 있어서 뭘 파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나라 식당인지조차도 몰랐지만, 음식사진만 보고 그냥 들어갔다.
파키스탄 음식점이었다. 젊은 파키스탄 새댁이 어린아이와 함께 있다가 수줍게 다가온다.
말도 잘 통하지 않아 사진으로만 음식을 시켰다. 쌀을 짧은 국수처럼 만들어 닭고기나 양고기, 소고기, 채소 등과 함께 볶은 음식인데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성지 입구의 냇물은 맑았다. ‘추수문장 불염진’(秋水文章 不染塵)이란 문장이 떠올랐다. 중국 북송시대 형제 학자 정명도와 정이천을 칭송하는 표현이다. 가을의 냇물처럼 욕심과 세속의 먼지에 물들지 않은 맑고 투명한 문장을 뜻한다.
성지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전 잠시 냇가로 내려갔다. 병인박해(1866년) 때 잡혀와 이 맑은 냇물을 건넜던 천주교 순교자들을 생각했다. 배교회유와 협박, 고문을 견디고 끝내 죽음이 기다리는 형장을 향해 걷던 천주교 순교자들.
이 내를 건너면 이승과는 이별이다. 저 골짜기 속에는 이들을 목 졸라 죽일 형리들이 기다리고 있다.
나라면 배교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이 내를 넘을 수 있었을까. 눈물이 났다. 잠시 묵상을 한 뒤 다리를 건넜다.
성지 입구 초를 봉헌하는 장소에 들러 가족들을 위해 잠시 기도했다. 한때는 나도 성당에 제법 열심히 다녔다. 프란치스코(아씨시의 성인)라는 영세명도 있다. 비록 지금은 ‘냉담자’ 신세지만 그래도 주변에서 천주교 신자를 만나면 반갑다.
남양성모성지는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 1704번지에 있다.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에 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가 이상각 신부의 헌신으로 1983년부터 성역화 사업이 시작됐다. 1991년 10월 7일엔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됐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보타가 설계한 ‘남양 성모마리아 대성당’은 우뚝 하지만 자연과 거스르지 않고 편안했다.
연면적 4958㎡(2층, 상징조형기둥 18m 2개) 규모로써 1층은 지역주민들이 문화ㆍ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소강당(370석 규모), 2층은 미사가 진행되는 성당(1400석 규모)이다.
동행한 이광호 시인(건축사)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한다. 큰 건물인데도 위압감이 없고 따듯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다.
사실 나도 성당 내부에 들어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 갈 때마다 문이 닫혀져 있었다.
성당에서 나와 산기슭에 난 산책길(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1 년도 안 되는 짧은 생을 보내고 무심처를 향해 간 낙엽을 밟으며 걷는 오후.
불교 법사이기도 한 이광호 시인은 낙엽길에 십자가 형상을 새긴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다. 저 십자가가 얼마나 무서운 형틀인데...오죽하면 드라큘라나 악령들도 십자가를 내밀면 도망치겠는가.
그때 이곳에서 이승을 떠난 순교자들과 달리 우리는 멀쩡한 몸으로 냇물을 건너 세상으로 돌아왔다.
“딱 한잔”은 열 잔이 됐고 다음날은 영락없이 숙취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