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태영 수원시장 당선자가 초등학교 졸업식 때 아버지와 함께.
소년가장에서 대기업 임원을 거쳐, 환경운동가로 변신, 내고향 수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쏟아보고 싶다며 이번에는 수원시장까지 당선됐다. 수원의 미래, 희망을 노래한 염태영 당선자. 밝은 이미지와는 달리 학창시절 부모와 조부모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3년 뒤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면서 졸지에 소년가장(누이 둘, 여동생과 남동생)이 됐다. 부모를 대신해 돌봐주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그로부터 2년 뒤인 고3 때 운명을 달리했다. 

지역에서 ‘수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했던 그지만,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에 잠시 학업을 포기할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학업에 매진해 서울대에 입학했다. 기쁨도 잠시 또다시 '등록금'이라는 시련이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꿈꾸면 이뤄진다고 했던가' 북석공파 염씨 문중에서 대학장학금을 마련해 줬다.

그는 감수성이 충만했던 시기에 역경을 딛고 일어난 원동력이 ‘절박함’이라고 말한다. 동생들의 뒷바라지와 꿈을 펼치기 위한 절박함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그때가 지금의 염태영을 만들었다”면서 “당시 절박했던 생활이 서민의 삶이 무엇인지,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수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대학시절 야학교사로 활동할 당시 매산초등학교 동창인 부인을 만나 결혼했다. 독재정권 타도와 민주화 등에 대한 시대적 고민을 공유하다가 부인과 사랑이 싹트게 됐다는 그는 “항상 신뢰를 주는 사람”이라고 부인을 소개했다.

대기업에 들어가 남들이 말하는 성공적인 길을 걷던 그가 돌연 시민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환경기술사인 그는 환경분야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느낀 문제의식을 시민운동으로 풀어내겠다며 순탄한 삶을 포기했다. 수원환경운동센터 사무국장과 공동대표를 지내는 동안 그는 ‘수원천 생태살리기 운동’을 벌여 수원천을 시민들의 친수공간으로 만들었다. 당시 업적은 전국 하천살리기 운동의 효시가 됐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방자치 실현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영역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전국지속가능발전협의회 초대 사무총장 겸 운영위원장을 맡았던 경험을 토대로 참여정부 청와대 비서관과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발탁돼 행정경험을 하게 됐다. 이후 지난 2006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수원시장에 출마하며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됐다. 낙선한 그는 “선거에 나선 것이 불행이 아니라 행복한 선택이었다”면서 “시민이 주인이 되는 지방자치시대를 여는 꿈을 꾸게 해준 소중한 경험”이라고 밝혔다.

이런 발자취는 빠른 결단력과 신속한 추진력이 밑바탕이 됐다고 그는 평가했다. 그는 “시련의 아픔은 자아를 성숙시키듯이 수원시민이 그동안 겪은 아픔(노쇠화)은 수원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있는 시장이 치유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2010년 6월 2일 그의 꿈이 이뤄졌다. 결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그의 당선은 ‘수원 변화’의 시작을 의미했고, 그가 그토록 실현해 보이고 싶다던 행정철학이 녹아든 풀뿌리 지방자치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했다.

한편, 당선자는 1960년 경기도 수원 율천동에서 태어나 수원 수성고와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뒤, 삼성건설과 두산그룹 등 기업에서 일한 바 있다. 현재 수원르네상스포럼 대표, 민주당 중앙당 부대변인, 민주당 경기도당 부위원장 (지방자치담당), 민주당 4대강사업 국민검증단 부단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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