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광민 선생(1895~1945)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만주에서 동화학교 교원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한족노동당을 창당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정의부 재무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한 이광민(李光民)  선생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895년 경북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난 선생은 백부인 이상룡이 세운 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애국사상을 함양했다.

1911년 백부 이상룡이 가족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자 같이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했다. 1916년 부민단 본부가 있는 통화현 삼도구 동화학교의 교사가 돼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간도 지역에서는 한족회를 설립해 민족운동 단체를 규합했다.

한족회는 이후 서로군정서로 명칭을 바꾸고 임시정부 산하의 무장 세력임을 천명했으며, 이광민 선생은 서로군정서의 최고지도자인 이상룡 선생을 최측근에서 보좌해 독립 투쟁 역사 상 커다란 전공을 거둔 청산리대첩이라는 대승을 거두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청산리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단행해 서간도 독립군기지를 초토화시켰다.

이후 서간도 독립운동계는 보다 효율적인 항일투쟁을 위한 독립군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1922년에 서간도, 남만주 독립군의 통합세력인 대한통의부가 성립됐다.

그러나 성립 후 일 년이 되지 않아 이념 상의 문제로 분열됐고, 1924년 중반 이후 또 다시 남만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통합운동이 전개됐다. 이 시기부터 선생은 독립운동계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서로군정서의 대표로 활약하며 통합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선생은 1924년 11월 4일 김응섭, 김경달 등과 함께 반석현 부태하에서 한족노동당을 조직해 이주한인의 계몽과 한인사회 단결을 위해 노력했다. 같은 달 24일, 하얼빈 남만주 독립운동 통합의 결실인 정의부가 성립되자 정의부 민사위원회 소속 서무과 주임위원에 선임돼 이주한인들의 호적 작성 및 독립군요원 징병 업무를 주관했다.

이듬해 2월 재무부장에 선임돼 정의부의 살림은 물론 관할 한인들을 지원하며 항일투쟁을 위한 전투력 증강에 최선을 다 했다.

1927년 초부터 만주 독립운동계에 민족유일당운동의 바람이 일어나자, 선생은 김동삼, 오동진 등 독립운동계 선배들과 길림현 신안둔에서 개최된 만주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운동에 정의부 대표로 참여하는 등 만주 독립운동계의 유일당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32년 5월 12일 이상룡 선생이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의 일가 대부분은 국내로 돌아왔으나 이광민은 끝까지 만주 땅을 떠나지 않고 동지들을 이끌고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은 해방 후 두 달 만인 1945년 10월 18일 만주 땅에서 운명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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