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침략을 경고하고 단식순절한 이중언 선생.
독립기념관이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이중언(李中彦) 선생을 올해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도 이번달 한 달간 야외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한다. 

 

이중언은 1850년 2월 안동의 하계마을에서 태어났다. 하계마을은 퇴계의 학문을 가장 잘 계승한 곳으로, 25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마을이기도 하다. 선생은 1879년 5월 대과에 합격해 성균관 전적과 사간원 정언을 거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됐으나,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의 이권침탈을 목도하고 오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후일을 준비했다.

이즈음 조선 조정이 중국인 황준헌의 ‘조선책략’정책을 수용하게 되자 선생은 이에 반대하고자 도산서원이 영남지역 전역으로 발송한 ‘통문(通文)’의 발의자로 참여했고, 고향 주변의 봉화군 임당산 골짜기로 들어가 은거했다. 

1895년 음력 8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으로 의병활동이 본격화되자 선생은 같은 해 12월 선성의진(宣城義陣)의 이중린 의병장 휘하의 전방장이 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다음해 3월에는 영주, 순흥의진과 연합하여 7000명 규모의 대규모 의진을 조직했다.

선생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당하자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다섯 도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문을 지어 을사늑약에 가담한 이완용 등 5명을 처단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또 선생은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자 항거의 뜻으로 단식을 시작했고, 일제를 향해 ‘경고문’을 써서 단식순국을 결행하는 이유와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선생은 강제로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찾아 온 일본 경찰을 서릿발 같은 기개로 꾸짖기도 했다. 

단식을 시작한 지 27일 만에 선생은 결국 순절했지만 죽음을 통해 국권피탈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고 이 같은 절의는 민족적 현실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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