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광복회와 공동으로 권준(權晙, 1895.5.2~1959.10.27)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기념관은 그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9월 한달간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개최하는 한편, 선생이 군생활 중 사용하던 망원경 등 사진 15점이 전시된다. 

권준 선생은 경상북도 상주군 함창면 척동리 168번지에서 태어났다. 1917년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비밀결사인 광복회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1919년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선생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의열단 창립단원으로 참여했고, 의열단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 자금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아 부산경찰서 폭파의거,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등의 의열투쟁을 지원했다.

1926년 3월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으로 입교한 선생은 보병과 소속으로 1926년 10월 졸업 후 국민혁명군 장교로 임관해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 교관으로 배속돼 항일투쟁을 위한 중국군 양성 및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 한국인 청년들의 군사교육을 담당했다.

1932년 초 의열단 지도부는 한ㆍ중 항일연합전선을 결성하기로 노선을 바꾸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고양된 중국인들의 반만항일 의식을 배경으로 항일투쟁 노선을 재정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장제스(蔣介石)의 승인을 얻어 난징(南京)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했다. 1932년 9월 개교한 이 학교는 1935년 9월까지 3년 동안 각기마다 6개월의 교육훈련과정을 운영하면서 120여 명의 항일투사를 길러냈다. 선생은 난징 교외의 탕산(湯山)에 위치한 선사묘(善祠廟)라는 사찰에 개설된 제1기생의 교관으로 축성학을 담당하며 독립운동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1933년 중국군 장교로 복귀한 선생은 중국군으로 복무하면서도 한인 독립운동진영과의 연계와 참여를 시도해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다. 1944년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해 군무부 산하의 군사학편찬위원, 내무부 차장, 경위대 대장 등을 역임하며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선생은 우한(武漢)지역 교포선무단 단장과 한국광복군 제5지대장으로 동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 안전한 귀국에 전념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했다. 귀국 후 선생은 건군(建軍)에 참여해, 육사 특8기로 졸업하고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다. 이후 초대 수도경비사령관, 초대 육군 제50사단장 등을 역임하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59년 10월 65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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